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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禑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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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365(공민왕 14)
졸년1389(공양왕 1)
시대고려후기
본관개성(開城)
활동분야왕실 > 왕
반야(般若)

[상세내용]

우왕(禑王)
1365년(공민왕 14)∼1389년(공양왕 1). 개성왕씨(開城王氏). 고려의 제32대왕. 재위 1374∼1388년.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의 소생이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하자 당시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근신(近臣)에게 자기가 전에 신돈의 집에 행차하여 그의 시비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은 바 있음을 밝힘으로써 공민왕의 아들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뒤 신돈이 주살된 직후에 궁중에 들어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하여졌으며, 백문보(白文寶)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를 사부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1374년에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李仁任)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서 옹립되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초부터 북원(北元)이나 명나라와의 복잡한 외교문제가 계속 발생하였고, 더욱이 왜구의 침탈이 극심하여 매우 불안정한 정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인임최영(崔瑩)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 또는 악소배(惡少輩)들과 사냥이나 유희를 일삼았다.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하여오자, 크게 분개하여 이성계(李成桂)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정벌이 실현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이성계에 의하여 최영이 실각함과 동시에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그뒤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驪州)으로 이치(移置) 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 11월에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다음달에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이성계 등은 우왕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 하여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고려사』에서도 우왕의 세가(世家)를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편입시켜 신우전(辛禑傳)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이성계 등의 공양왕옹립이나 조선건국을 합리화시키려 하는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李朝建國의 硏究(李相佰, 乙酉文化社, 1949)
恭愍王(金哲埈, 韓國의 人間像 1, 新丘文化社, 1965)
高麗禑王代의 政治權力의 性格과 그 推移(朴天植, 全北史學 4, 1980)
李仁任政權에 대한 一考察(高惠玲, 歷史學報 91, 1981)

[집필자]

민현구(閔賢九)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