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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인(李崇仁)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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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안(子安)
호(號)도은(陶隱)
생년1347(충목왕 3)
졸년1392(태조 1)
시대고려후기
본관성주(星州)
활동분야학자 > 유생
저서『도은시집』

[상세내용]

이숭인(李崇仁)
1347년(충목왕 3)∼1392년(태조 1). 고려 말기의 학자이며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 자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陶隱). 본관은 성주(星州).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고 그뒤 장흥고사 겸 진덕박사(長興庫使兼進德博士)가 되었다. 문사(文士)를 뽑아 명나라에 보낼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25세가 못 되었으므로 보내지 않았다.

예의산랑(禮儀散郞)예문응교(藝文應敎)문하사인(門下舍人)을 지내고, 우왕전리총랑(典理摠郞)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다시 돌아와서 성균사성이 되고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전임하여 동료와 함께 소를 올려 국가의 시급한 대책을 논하였다.

그뒤 밀직제학이 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실록을 편수하고, 동지사사(同知司事)로 전임하였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어서는 원나라 서울에 가서 신정(新正)을 축하하고 돌아와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창왕박천상(朴天祥)하륜(河崙) 등과 더불어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진위를 변론하다가 무고에 연좌되어 헌사(憲司)가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므로 피하여 다니다가 시중 이성계(李成桂)의 도움으로 다시 서연(書筵)에 시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관 구성우(具成佑)오사충(吳思忠)남재(南在)심인봉(沈仁鳳)이당(李堂) 등이 상소, 탄핵하여 경산부로 유배당하였다.

이때 첨서밀직사사 권근(權近)이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무죄를 상소하였으나 간관이 도리어 권근의 상소가 거짓을 꾸민 것이라 상소하니 창왕은 그를 우봉현(牛峰縣)에 유배하였다.

공양왕 때 간관이 그를 다시 논죄하여 타군에 옮겨 유배하였고, 뒤에 청주옥(淸州獄)에 수감되었으나 수재로 말미암아 사면되었다. 얼마 뒤 소환되어 지밀직사사동지춘추관사가 되었으나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또 삭직당하고 멀리 유배되었다.

조선조의 개국에 이르러 자기와 함께 처세하지 않은 데 앙심을 품고 정도전이 보낸 심복 황거정(黃居正)에 의하여 유배소에서 장살(杖殺)되었다.

그는 천자(天資)가 영예하고 문사(文辭)가 전아하여, 이색(李穡)이 칭찬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할지라도 많이 얻지 못할 것이다.” 하였고, 명나라 태조(太祖)도 일찍이 그가 찬한 표문(表文)을 보고 이를 가상히 여겨 “표의 문사가 참으로 절실하다.”고 하였으며,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저서로 『도은시집』 5권이 있는데, 그 서문에 의하면 그의 생존시에 『관광집(觀光集)』『봉사록(奉使錄)』『도은재음고(陶隱齋吟藁)』 등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慵齋叢話
象村集
海東樂府
陶隱集

[집필자]

배종호(裵宗鎬)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