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박상충(朴尙衷)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BC15C0C1CDA9B1332X0
자(字)성부(誠夫)
시호(諡號)문정(文正)
생년1332(충숙왕 후1)
졸년1375(우왕 1)
시대고려후기
본관반남(潘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박수(朴秀)

[상세내용]

박상충(朴尙衷)
1332년(충숙왕 복위 1)∼1375년(우왕 1).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성부(誠夫). 밀직부사 박수(朴秀)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이때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을 지어 사전(祀典)을 썼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생원의 수를 늘려 100인으로 하고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를 마련하여 생원을 교수하게 하였는데, 이때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경술(經術)의 사(士)로 교관을 겸하게 되었다.

뒤에 전교령(典校令)이 되었는데, 이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복을 입으려 하였으나 사대부들이 부모상에 100일만 복을 입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

1375년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책에 대하여 임박(林樸)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친명책을 주장하였다. 뒤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과 북원(北元)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하였다.

그해 간관 이첨(李詹)전백영(全伯英)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 이인임지윤(池奫)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친명파인 전녹생(田祿生)정몽주김구용이숭인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귀양가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성품이 침착하여 말이 적고 강개하여 큰 뜻이 있었으며, 경사에 해박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성명학(星命學)에도 통달하였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부지런하고 삼가하며 사람이 불의로 부귀함을 보면 멸시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