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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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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영숙(穎叔)
호(號)목은(牧隱)
시호(諡號)문정(文靖)
생년1328(충숙왕 15)
졸년1396(태조 5)
시대고려후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이곡(李穀)
저서『목은문고(牧隱文藁)』
저서『목은시고(牧隱詩藁)』
공신호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상세내용]

이색(李穡)
1328년(충숙왕 15)∼1396년(태조 5). 고려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조부는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이며, 부친은 찬성사 이곡(李穀)이다. 외조부는 함창김씨(咸昌金氏) 김택(金澤)(주1)
외조부
함창김씨족보를 참고하여 외조부를 추가함.
이고, 처부는 권중달(權仲達)(주2)
처부
본인의 고려문과방목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함.
이다.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 출사 및 관직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郞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내고 귀국하여 전리정랑 겸사관편수관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郞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해 귀국하여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郞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郞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하여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좌승선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보문각예문관대제학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여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 우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2. 고려창왕옹립과 유배
1389년(공양왕 1)위화도회군으로 우왕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고,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하여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일파가 세력을 잡게 되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하여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여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3. 사상과 학문
그는 원‧명교체기에 있어서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말 신유학의 수용과 척불론의 대두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王建) 때의 중흥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시정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에 의하여 불교폐단 방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여부로 판단하는 인간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을 하며, 저서에 『목은문고(牧隱文藁)』『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東文選
朝鮮金石總覽
李朝建國의 硏究(李相佰, 乙酉文化社, 1949)
李穡硏究(李銀順, 梨大史苑 4, 1962)
牧隱硏究(孫洛範, 國際大學人文科學硏究所論文集 3, 1975)
李穡의 佛敎觀(安啓賢, 趙明基博士華甲記念佛敎史學論叢, 1965)
李穡(李相殷, 高麗‧朝鮮初期의 學者 9人, 1974)
牧隱 李穡과 그의 政治思想에 관한 硏究(朴珠, 曉星女子大學論文集 25, 1982)

[이미지]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명 : "색(穡)"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紀年便攷v4見下
紀年便攷v4七屢有戰㓛策元㓛封高興府院君㳟愍朝為相時大旱搆魯國公主影殿大興工役濯上書請停王怒将殺之命李穡製諭衆文奏以濯無死罪王怒并幽之穡泣曰臣非畏死恐王殺無罪大臣貽譏後世王并释之辛亥憲府論劾濯於公主喪葬用薄禮又黨
紀年便攷v4院君㳟愍朝為相時大旱搆魯國公主影殿大興工役濯上書請停王怒将殺之命李穡製諭衆文穡奏以濯無死罪王怒并幽之泣曰臣非畏死恐王殺無罪大臣貽譏後世王并释之辛亥憲府論劾濯於公主喪葬用薄禮又黨附辛旽知謀不告請寘典刑遂
紀年便攷v5昌恐諸將違已意立王氏以韓山君李穡爲時名儒欲藉其言密問於穡亦欲立昌乃曰當立前王之子太祖謂敏修曰其如回軍時所言何敏修作色曰元子之立韓山君已㝎筞矣何可違也遂以㝎
紀年便攷v5昌恐諸將違已意立王氏以韓山君李穡爲時名儒欲藉其言密問於穡亦欲立昌乃曰當立前王之子太祖謂敏修曰其如回軍時所言何敏修作色曰元子之立韓山君已㝎筞矣何可違也遂以㝎妃
紀年便攷v5右侍中賜敏修及太祖㓛臣號禑之放江華也太祖欲擇立王氏後敏修欲立昌恐諸將違已聞李穡爲時名儒欲藉其言密問之曰當立前王之子敏修以定妃教立昌時年九歲敏修感李仁任薦拔之恩欲立仁任外兄弟李琳女謹妃之子昌爲王遂藉李穡
紀年便攷v5李琳納其女爲辛禑謹妃封鑯城府院君官至判開城府事李穡舉琳自代遂以琳爲侍中未幾辛昌立命琳及我。太祖劒履上殿賛拜不名賜教書綵馬匹從鄭夢周之請也
紀年便攷v5号雙清堂與李穡同榜與多唱酬之詩
紀年便攷v5王昉䓁還自京師啓曰禮部召臣䓁乃出彛初所紀䓁姓名以示之曰爾還國將其書內人䓁詰問來報胖与彛䓁對卞曰本國事大以誠安有是乎彛愕然失色禮部官曰天子聖明
紀年便攷v5諌官請寘極律乃削職并敏
紀年便攷v5以爲不可宰相等潜遣我等來告天子仍請親王動天下兵來討因使臣韓尙敬諭此意高麗屡遣使辨誣自禮部乃出彛初所記等姓名以示之曰爾還國將其書內人等詰問來報使臣趙胖與彛等廷辨於禮部曰本國事大以誠安有是乎因問彛曰爾位至
紀年便攷v5攘之義國運訖曰此翁堪畵禑之放江華也穡以微服徃省之曹敏修欲立昌密問于穡穡曰當立前王之子敏修藉此言遂立昌與鄭夢周心同跡異革命放于韓山作胡不歸詞曰胡不歸胡不歸無不足方奚所疑青山隱隱方水鏡凈我膝所屈惟釣磯甞有
紀年便攷v5洪武年号戊辰攻遼之日貽書崔瑩明尊攘之義國運訖曰此翁堪畵禑之放江華也穡以微服徃省之曹敏修欲立昌密問于穡曰當立前王之子敏修藉此言遂立昌穡與鄭夢周心同跡異革命放于韓山作胡不歸詞曰胡不歸胡不歸無不足方奚所疑青
紀年便攷v5不忘松岳之意月朔登村後岳望哭松岳四拜而下人名其岳曰月望岳甞遺誡諸子曰汝黔陽移驪興革命後流碧沙太祖召見長揖不拜 上下榻待以賓禮俄而侍講以次列進 上還陞榻穡昂然而起曰老夫無坐䖏 上曰願承一教穡曰亡國之大夫
紀年便攷v5碧沙太祖召見穡長揖不拜 上下榻待以賓禮俄而侍講以次列進 上還陞榻穡昂然而起曰老夫無坐䖏 上曰願承一教曰亡國之大夫不可以圖存但當將此骸骨歸葬故山而已遂出官止門下侍中右文館大提學本朝加進輔國封韓山伯丙子暴
紀年便攷v5行洪武年号戊辰攻遼之日貽書崔瑩明尊攘之義國運訖曰此翁堪畵禑之放江華也穡以微服徃省之曹敏修欲立昌密問于穡曰當立前王之子敏修藉此言遂立昌穡與鄭夢周心同跡異革命放于韓山作胡不歸詞曰胡不歸胡不歸無不足方奚所疑
紀年便攷v5薨後帝每徵執政大臣皆畏懼不敢行及穡爲酋相請自行我太祖稱之曰慷慨㢤是翁以穡及李崇仁充賀正使太宗爲書状官至京師帝素聞穡名禮過甚重穡還語人曰今皇帝心無所主之主也我意帝必問此事則帝不之問帝之所問皆非我意時議譏
紀年便攷v5䓁勳封咸豊君官止正尹上護軍戊午勸行洪武年号戊辰攻遼之日貽書崔瑩明尊攘之義國運訖曰此翁堪畵禑之放江華也以微服徃省之曹敏修欲立昌密問于穡穡曰當立前王之子敏修藉此言遂立昌穡與鄭夢周心同跡異革命放于韓山作胡不
紀年便攷v5大臣皆畏懼不敢行及穡爲酋相請自行我太祖稱之曰慷慨㢤是翁以穡及李崇仁充賀正使太宗爲書状官穡至京師帝素聞名禮過甚重穡還語人曰今皇帝心無所主之主也我意帝必問此事則帝不之問帝之所問皆非我意時議譏之始至帝引見之
紀年便攷v5學問不純崇信佛法爲世所譏自恭愍薨後帝每徵執政大臣皆畏懼不敢行及穡爲酋相請自行我太祖稱之曰慷慨㢤是翁以及李崇仁充賀正使太宗爲書状官穡至京師帝素聞穡名禮過甚重穡還語人曰今皇帝心無所主之主也我意帝必問此事則
紀年便攷v5生產雖至屡空不以爲意然志節不固無大建白學問不純崇信佛法爲世所譏自恭愍薨後帝每徵執政大臣皆畏懼不敢行及爲酋相請自行我太祖稱之曰慷慨㢤是翁以穡及李崇仁充賀正使太宗爲書状官穡至京師帝素聞穡名禮過甚重穡還語人
紀年便攷v5望岳甞遺誡諸子曰汝黔陽移驪興革命後流碧沙太祖召見穡長揖不拜 上下榻待以賓禮俄而侍講以次列進 上還陞榻昂然而起曰老夫無坐䖏 上曰願承一教穡曰亡國之大夫不可以圖存但當將此骸骨歸葬故山而已遂出官止門下侍中右
紀年便攷v5敢行及穡爲酋相請自行我太祖稱之曰慷慨㢤是翁以穡及李崇仁充賀正使太宗爲書状官穡至京師帝素聞穡名禮過甚重還語人曰今皇帝心無所主之主也我意帝必問此事則帝不之問帝之所問皆非我意時議譏之始至帝引見之見其貌不揚周
紀年便攷v5中國未易多得高皇帝甞覧崇仁所撰表嘉之曰表辭誠㘦中原士大夫觀其著述亦莫不歎服與鄭道傳同師李穡而才名過之咸稱崇仁所作嗚呼島詩道傳忌之積不平崇仁甞作詩曰山北山南細路分松花含露落紛紛道人汲井歸茅舍一帶青煙染白
紀年便攷v5珸子字純仲號桑村初名子粹字去礦恭愍王甲寅以生貟登科壮元以正言劾曺敏修濫賞杖流突山與鄭夢周李穡等爲師友作純仲字說厯忠清觀察使官止判司宰寺事政亂退居安東廢王遇害于江陵自粹不勝悲憤北向慟哭惟日飮我太祖即位以
紀年便攷v6始放于韓州流種學種善于外王謂曰卿之二子得罪於朝郷其去矣両江之外惟郷所適穡撫然曰臣顧無田宅果安歸乎遂貶衿川尋徙驪興
紀年便攷v6始放于韓州流種學種善于外王謂穡曰卿之二子得罪於朝郷其去矣両江之外惟郷所適撫然曰臣顧無田宅果安歸乎遂貶衿川尋徙驪興
紀年便攷v6鄭道傳與玄寶有宿怨請穡玄寶寘極典 上曰卿勿再言召穡待以故舊賜田及米豆蘭肉曰卿已老矣宜復食肉事佛断酒肉故有此教又賜材瓦造居第封韓山伯仍兼五庫都提調玄寶給職牒
紀年便攷v6鄭道傳與玄寶有宿怨請玄寶寘極典 上曰卿勿再言召穡待以故舊賜田及米豆蘭肉曰卿已老矣宜復食肉穡事佛断酒肉故有此教又賜材瓦造居
紀年便攷v6鄭道傳與玄寶有宿怨請穡玄寶寘極典 上曰卿勿再言召待以故舊賜田及米豆蘭肉曰卿已老矣宜復食肉穡事佛断酒肉故有此教又賜材瓦造居第封韓山伯仍兼五庫都提調玄寶
紀年便攷v6李鍾學子恭愍王辛丑生字仲文號麟齋辛禑丙辰十六以生員登科官止進賢舘提學太祖壬申為權臣所陷流長沙茂長古號云行至
紀年便攷v16李稔八世孫生纔七嵗父母有疾夙夜持藥積三十年無怠色居丧廬墓朝夕上塜風雨不廢事聞旌閭豎碑所居宣祖壬辰與申湛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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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志v1字孟儀初名敬江陵人遁村李集有女擇壻問於牧隱李穡曰吾門下士多矣性氣溫雅未有如權近劉敞二人集遂以敞爲壻敞嘗過陽村坐久陽村辭以未朝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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