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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송수(元松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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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문정(文定)
생년1324(충숙왕 11)
졸년1366(공민왕 15)
시대고려후기
본관원주(原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원선지(元善之)
조부원경(元卿)
증조부원부(元傅)
처부권렴(權廉)
공신호충근찬화공신(忠勤贊化功臣)

[상세내용]

원송수(元松壽)
1324년(충숙왕 11)∼1366년(공민왕 15). 고려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충렬왕중찬(中贊)을 지낸 원부(元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 원경(元卿)이고, 부친은 첨의평리(僉議評理) 원선지(元善之)이다. 찬성사 권렴(權廉)의 딸과 혼인하여 원서(元序)원상(元庠)두 아들을 두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고 곧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수찬이 되었다.

1344년(충목왕 즉위)에는 안진(安震)이제현(李齊賢)의 천거로 서연(書筵)에 참여하였으며, 얼마 뒤에 헌납(獻納)이 되었다.

이때 헌납 곽충수(郭忠秀)와 함께 찬성사 정천기(鄭天起)가 고신(告身)을 받지 않은 채 곧바로 정방(政房)에 들어가 일을 보고 있음을 들어 탄핵하였다가 파직당하였다.

1351년(충정왕 3)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나갔으며, 다음해에 공민왕에게 발탁되어 내서사인 겸 좌부대언(內書舍人兼左副代言)에 올랐다. 이후 왕의 신임을 받아 지주사(知奏事)로 옮기고 전주(銓注)에 참여하였는데, 사사로운 정에 흐르지 않고 공정을 기하였다.

1363년(공민왕 12) 홍건적의 난이 평정된 뒤 왕의 파천(播遷)을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이해에 이강(李岡)을 천거하여 기무(機務)를 관장하는 직임을 대신하게 한 뒤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오르고 충근찬화공신(忠勤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일찍이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정동행성(征東行省)도진무(都鎭撫)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365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으나 곧 신돈(辛旽)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고, 다음해에 신돈이 더욱 권세를 부리자, 이것을 근심하고 분하게 여기다 병을 얻어 죽었다. 왕명으로 장례를 지내고 가등(加等)되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박창희(朴菖熙)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