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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배(金得培)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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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난계(蘭溪)
시호(諡號)문충(文忠)
생년1312(충선왕 4)
졸년1362(공민왕 11)
시대고려후기
본관상산(商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녹(金祿)
공신호이등공신
공신호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

[상세내용]

김득배(金得培)
1312년(충선왕 4)∼1362년(공민왕 11).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상산(商山). 호는 난계(蘭溪).

부친은 판전의(判典醫) 김녹(金祿)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보직되었으며, 그뒤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서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제수받았으며, 1357년(공민왕 6)에 서북면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가 되었다가, 이어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에 오르고,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서경윤상만호(西京尹上萬戶)가 되었다.

1359년 정월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가 되었으며, 그해 6월에 기철(奇轍)을 숙청한 공으로 이등공신에 올랐다. 같은해 10월에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홍건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모거경(毛居敬)이 4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하였으며,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 및 주민 1천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어 정주(靜州)에서는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을 죽이고 인주(麟州)까지 함락시켰다.

이때 그는 도지휘사가 되어 서북면도원수 이암(李嵒), 부원수 경복흥(慶復興)과 더불어 적에 대비하고,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분전하여 서경을 탈환하고 압록강 밖으로 적을 격퇴시켰다.

1360년 3월에 그 공으로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에 책봉되고, 정당문학을 제수받았다. 같은 해 10월에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고, 정몽주(鄭夢周)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1361년 다시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 이성(泥城)으로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도지휘사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방어했으나, 안주에서 대패, 개경까지 함락당하였다.

다음해에 안우이방실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을 베고, 적 10여만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이들을 격퇴시켰다.

이때,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 김용(金鏞)이 거짓으로 조서를 꾸며 안우이방실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살해할 것을 명하자, 이들은 그것을 믿고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죄를 입어 안우이방실이 살해되었으며, 그도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되어 도망하여 산양현(山陽縣)에 숨었으나 체포되어 상주에서 효수되었다. 그의 문생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그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을 지어 그의 억울한 죽음을 개탄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 자손도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신천식(申千湜)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