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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王煦)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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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권재(權載)
이명(異名)탈환(脫歡)
시호(諡號)정헌(正獻)
생년1296(충렬왕 22)
졸년1349(충정왕 1)
시대고려후기
본관안동(安東)
활동분야문신 > 문신
왕부(王溥)

[상세내용]

왕후(王煦)
1296년(충렬왕 22)∼1349년(충정왕 1).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재(權載), 몽고명은 탈환(脫歡)이다.

정승 왕부(王溥)의 아들이다.

충선왕의 신임을 받은 형 왕준(王準)의 덕분으로 낭장에 오르고, 다시 삼사판관(三司判官)으로 전임되었다.

충선왕원나라에 있을 때 불려가서 아들로 입적되면서 왕후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1308년(충렬왕 34) 충렬왕의 죽음으로 충선왕과 함께 돌아와 사복부정(司僕副正)을 거쳐 사헌집의(司憲執義)에 제수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1316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더하여 봉해지자, 그때 사람들이 왕의 아우라 칭하였다.

1314년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원나라에 들어가 있던 충선왕의 요청으로 다시 원나라에 가서 황태자의 시그루치(速古赤: 侍子)가 되고, 계림군공(鷄林君公)의 작위와 전택을 하사받았다.

1320년 원나라 환관 빠앤투구스(伯顔禿古思)의 모함으로 티베트(西藏) 지방에 귀양간 충선왕을 대신하여 가겠다고 하여 원제(元帝)를 감동시켰다.

문객 세명을 데리고 티베트에 가서 충선왕을 만났는데, 마침 용서한다는 황제의 명령이 내려져 충선왕을 호위하고 원나라서울로 돌아왔다.

1325년 충선왕이 죽자 최마복(衰麻服)을 입고 영구를 모시고 고려로 돌아와 장사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마다 사사로이 능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죽은 지 20여년이 지나도록 충선왕의 시호가 없으므로 원나라에 가서 시호를 청하고, 아울러 충숙왕의 시호도 받아 돌아왔으며, 1344년(충목왕 즉위)에는 성절사(聖節使)원나라에 다녀왔다.

이해 우정승에 임명되었으나, 다음해 정방(政房)을 폐하고 인사권을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에 각각 귀속시킨 일과 권세가에게 소속된 녹과전(祿科田)을 원상태로 회복하려는 일을 시도하다가 도리어 권문세가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6년 입조하라는 순제(順帝)의 명에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좌정승 김영돈(金永旽)과 함께 제지(帝旨)를 가지고 돌아와서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 영돈찬성사 안축(安軸), 판밀직(判密直) 김광철(金光轍)과 함께 판사가 되어 33인의 속관(屬官)으로 각 도의 토지를 측량하도록 하였다.

이때 기황후(奇皇后)의 친척인 기삼만(奇三萬)이 세력을 믿고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 불법을 자행하므로, 정치도감의 다른 관원과 같이 붙잡아 곤장을 때려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죽였다.

1347년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에 임명되고 다음해 다시 정승에 올랐는데, 마침 개경에 기근이 크게 들고 양광도(楊廣道)서해도(西海道)의 경우 더욱 심하므로, 창고를 풀어 진휼한 덕택으로 혜택을 입은 자가 많았다.

이해 충목왕이 죽자 덕녕공주(德寧公主)의 명령으로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 기철(奇轍)과 함께 정동성(征東省)의 일을 섭행하면서, 이제현(李齊賢)원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려 다음 왕의 계승을 청하였다.

1349년(충정왕 1) 원나라에 가서 성절을 축하하고 돌아오던 중에 창의현(昌義縣)에 이르러 병사하였다.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이희덕(李熙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