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趙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870C704FFFFB1287X0 |
자(字) | 계보(季寶) |
생년 | 1287(충렬왕 13) |
졸년 | 1348(충목왕 4) |
시대 | 고려후기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조인규(趙仁規) |
출신지 | 평양부(平壤府)상원 |
[상세내용]
조위(趙瑋)
1287년(충렬왕 13)∼1348년(충목왕 4). 고려의 문신. 자는 계보(季寶). 평양부(平壤府)상원 출신. 충렬왕 때 자의 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를 지낸 조인규(趙仁規)의 아들이다.
9세에 아버지의 문음(門蔭)으로 창희궁(昌禧宮)의 권무(權務)가 된 뒤 여러 번 승진하여 대호군에 이르렀다. 충선왕 때 밀직대언(密直代言)을 거쳐 충숙왕 때에는 언부총랑(讞部摠郞)이 되었다.
1320년(충숙왕 7)에 원나라의 사신 실리미(失里迷)가 황후책봉의 조서를 가지고 고려에 왔을 때 왕이 이를 봉안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므로 “왕이 병이 났다.”고 해명하여 무마하였다.
충숙왕이 심양왕(瀋陽王) 고(暠)와 알력이 있을 때 형인 연(璉)‧연수(延壽)와는 달리 심양왕을 돕지 않았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원윤(元尹)의 직으로 있다가, 뒤에 누명이 벗겨져 지밀직(知密直)으로 특진되었다. 얼마 뒤 판밀직(判密直)으로 전보되고, 곧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승진되어 평양군(平壤君)에 봉하여졌다.
1332년(충혜왕 2)에 사사로이 방문객과 더불어 국사(國事)를 비방하였다는 무고를 받아 복주목사(福州牧使)로 좌천되었는데, 조정의 재촉이 심하여 급히 부임하여 마침내 병을 얻었다.
1347년(충목왕 3)에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진봉(進奉)된 뒤 죽었다.
9세에 아버지의 문음(門蔭)으로 창희궁(昌禧宮)의 권무(權務)가 된 뒤 여러 번 승진하여 대호군에 이르렀다. 충선왕 때 밀직대언(密直代言)을 거쳐 충숙왕 때에는 언부총랑(讞部摠郞)이 되었다.
1320년(충숙왕 7)에 원나라의 사신 실리미(失里迷)가 황후책봉의 조서를 가지고 고려에 왔을 때 왕이 이를 봉안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므로 “왕이 병이 났다.”고 해명하여 무마하였다.
충숙왕이 심양왕(瀋陽王) 고(暠)와 알력이 있을 때 형인 연(璉)‧연수(延壽)와는 달리 심양왕을 돕지 않았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원윤(元尹)의 직으로 있다가, 뒤에 누명이 벗겨져 지밀직(知密直)으로 특진되었다. 얼마 뒤 판밀직(判密直)으로 전보되고, 곧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승진되어 평양군(平壤君)에 봉하여졌다.
1332년(충혜왕 2)에 사사로이 방문객과 더불어 국사(國事)를 비방하였다는 무고를 받아 복주목사(福州牧使)로 좌천되었는데, 조정의 재촉이 심하여 급히 부임하여 마침내 병을 얻었다.
1347년(충목왕 3)에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진봉(進奉)된 뒤 죽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신천식(申千湜)
봉호 : "평양군(平壤君)"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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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