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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축(安軸)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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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당지(當之)
호(號)근재(謹齋)
시호(諡號)문정(文貞)
생년1282(충렬왕 8)
졸년1348(충목왕 4)
시대고려후기
본관순흥(順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안석(安碩)

[상세내용]

안축(安軸)
1282년(충렬왕 8)∼1348년(충목왕 4).(주2)
생몰년
안축의 생년을 살펴보년, 『고려사』 제109권 안축 열전의 "안축(安軸)의 자는 당지(當之)이니... 62세에 죽었는데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를 근거로 하면 1287년생이 된다. 그런데 『양촌선생문집』 제35권 [동현사략(東賢事略)] 찬성안축(安軸)편에 "공의 자는 당지(當之)이고 호는 근재(謹齋)요, 본관은 흥녕(興寧)인데 지금의 순흥(順興)이다. ...무자년(1348, 충목왕4) 봄에 졸하니 나이는 67세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로 되어 있고, 『가정집(稼亭集)』 제11권의 [안축묘지명]에는 "공의 휘는 축(軸)이요, 자는 당지(當之)이다. ... 무자년(1348) 6월 21일에 졸하고 7월 11일에 대덕산(大德山)에 장사 지냈으니, 향년 67세였다."로 되어 있어 이를 따르면 1282년이 된다. 여기서는 묘지명이 실린 『양촌선생문집』과 『가정집』을 따른다.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주1)
본관 및 자호
『양촌선생문집』 제35권 [동현사략(東賢事略)] 찬성안축(安軸)편에 "공의 자는 당지(當之)이고 호는 근재(謹齋)요, 본관은 흥녕(興寧)인데 지금의 순흥(順興)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로 되어 있고, 『고려사』 제109권 안축 열전에는 "안축(安軸)의 자는 당지(當之)이니 복주 흥녕현(福州興寧縣) 사람이다.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부친은 안석(安碩)이다.

고향 순흥죽계(竹溪: 지금의 豊基)에서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유학자층의 한 사람으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금주사록(金州司錄)사헌규정(司憲糾正)단양부주부(丹陽府注簿)를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그곳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서 성균학정(成均學正)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거쳐,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파견되었다. 이 때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충군애민(忠君愛民)의 뜻이 담겨 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서 파면당하였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되었으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판서감찰대부(監察大夫) 등에 등용되고, 이어 교검교평리(校檢校評理)로서 상주목사를 지내고, 1344년(충목왕 즉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차례로 지내고 1347년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量田)행정에 참여하였다. 그 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이제현(李齊賢) 등과 개찬하였고, 또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한편, 경기체가인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어 문명이 높았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하여진 뒤 죽었다. 순흥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근재집(謹齋集)』이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
『양촌선생문집』

[이미지]

[집필자]

박노춘(朴魯春)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7-25稼亭集(이곡)과 陽村集(권근)을 참고하여 생년을 정해(1287)에서 임오(1282)로 수정함. 고려사에는 향년이 62세, 가정집과 양촌집에서는 향년 67세로 나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