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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좌(尹宣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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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순수(淳叟)
생년1265(원종 6)
졸년1343(충혜왕 후4)
시대고려후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윤선좌(尹宣佐)
1265년(원종 6)∼1343년(충혜왕 복위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순수(淳叟). 문하시중 윤관(尹瓘)의 7대손이다. 나면서부터 영특하여 7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1288년(충렬왕 14)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김해장서기(金海掌書記)가 되었다가 비서랑(祕書郞)직문한서(直文翰署)에 보임되었다. 충선왕초에 좌정언에 임명되고, 이어 우사보(右思補)내서사인(內書舍人)선부의랑(選部議郞)에 전직되었다.

그뒤 전라도 지방을 안찰할 때 강직함이 알려져 도율령(都律令)으로 승직, 충숙왕이 평소에 그의 이름을 듣고 즉위하여 성균좨주에 제수하고 부인(符印)을 관장하게 하였다. 곧 이어 사헌집의가 되어 윤신걸(尹莘傑), 백원항(白元恒)과 더불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진강하였다.

그뒤 일시 파직되었다가 다시 집의에 임명되었다.

1322년(충숙왕 9)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이 왕을 폐하고 심왕(瀋王) 고(暠)를 대신 세우려는 책동을 부리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대간‧문한(文翰)들의 서명을 받지 못하게 하여 그 계획을 좌절시켰다. 왕이 원에 머문 지 5년이 되어 재정이 부족하였는데 심왕 의 일당이 사정을 알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운반을 저지하자, 감찰관 조관(趙琯)을 움직여 운송하도록 하였다. 왕이 귀국하자 판전교(判典校)가 되고, 민부전서(民部典書)로서 한양윤(漢陽尹)을 겸하였으며, 1331년(충혜왕 1) 이윤(伊尹)의 고사를 들어 앞당겨 치사하였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다시 계림윤(鷄林尹)에 임명되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藝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에 제배(除拜)되었다가 치사하였다.

1343년 자녀들에게 가업을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화목할 것을 훈계한 뒤 죽었다.

경학에 밝고, 노장(老莊)‧형명(刑名)의 학도 연구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당대 표전(表箋)을 많이 지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이희덕(李熙德)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