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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李混){1}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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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일우(一宇)
자(字)태초(太初)
호(號)몽암(蒙菴)
시호(諡號)문장(文莊)
생년1252(고종 39)
졸년1312(충선왕 4)
시대고려후기
본관전의(全義)
활동분야문신 > 문신
공신호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

[상세내용]

이혼(李混)
1252년(고종 39)∼1312년(충선왕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거화(去華)일우(一宇)태초(太初), 호는 몽암(蒙菴).

뒤에 예안백(禮安伯)에 봉해져 예안이씨의 토대가 되었고, 손자인 이익(李翊)이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예안군(禮安君)에 봉해져 예안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1268년(원종 9)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참군(廣州參軍)이 되었고, 뒤이어 국학학정(國學學正)이 되었다. 충렬왕초에 첨의사우부승지(僉議舍人右副承旨)를 거쳐 1292년(충렬왕 18) 부지밀직사사 문학학사승지(副知密直司事文學學士承旨)가 되었으며, 1294년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거쳐 이듬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296년에는 도당(都堂)에서 시폐(時弊)를 상언(上言)한 것이 왕의 노여움을 샀는데, 그 발의자로 혐의를 받아 옥에 갇혔다가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지밀직사사 세자원빈(知密直司事世子元賓)이 되었고, 이듬해 관제개혁에 따라 검교사공(檢校司空) 서경유수(西京留守) 평양부윤(平讓府尹)이 되었으며, 밀직사사 전조판서 집현전대학사 수국사(密直司事銓曹判書集賢殿大學士修國史)가 되었다.

1299년 다시 파직을 당했으나 1303년 지밀직사사로 기용되어 이듬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고, 이어 1307년에는 도첨의찬성사 판판도사사(都僉議贊成事判版圖司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해 하정사(賀正使)원나라에 가서 그곳에 있던 충선왕밀직중방(重房)내시(內侍)‧삼관(三官)‧오군(五軍)을 모두 폐지한다는 내용의 관제개혁을 결정하고 돌아왔다.

1308년 충선왕원나라에서 즉위하자 대사백(大詞伯)에 봉해지고 벽상삼한공신(壁上三韓功臣)에 녹훈되었다.

그러나 관제개혁으로 실직당한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아오던 중, 숙비(淑妃)의 미움을 받아 회주(淮州)예주(禮州) 등지의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소환되어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이혼이 전선(銓選)를 주관하던 때에 충선왕이 아우 이자화(李子和)를 행수(行首)로 삼고자하자 이혼이 이를 상피(相避)하였다. 성품은 관후하였으나 청렴하지 못하여 전선으로 있을 때 뇌물로 재산을 모았으며, 빈객을 좋아하고 거문고와 바둑을 즐겼다.

또 시문에 능하여 장단구 몇 편이 세상에 유행하였으며, 영해에 귀양갔을 때 지은 「무고(舞鼓)」가 『악부(樂府)』에 전한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아들로 이이(李異)(주1)
아들
고려사에 이혼열전에 의하면 아들 이이(李異)는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악정인데 선졸무자(先卒無子)라고 되어 있고, 최해의 동인지문에는 아들 이언승(李彦昇)은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악정인데 선졸무자(先卒無子)라 되어 있다. 이로보아 이이와 이언승은 동일인으로 추정되나, 예안이씨족보에서는 이이와 이언승은 형제로 기록되어 있다. 손자 이익(李翊)이 이언승의 아들이다.
가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