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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항(萬恒)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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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광조(廣照)
시호(諡號)혜감국사(慧鑑國師)
생년1249(고종 36)
졸년1319(충숙왕 5)
시대고려후기
본관공주(公州)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박경승(朴景升)

[상세내용]

만항(萬恒)
1249년(고종 36)∼1319년(충숙왕 5). 고려말의 고승. 조계산 수선사(修禪社) 제10세 국사이다. 성은 박씨(朴氏), 본관은 공주(公州).

부친은 진사 박경승(朴景升)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였으며, 구산선(九山選)에 응시하여 장원에 뽑혔으나 명리(名利)를 버리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뒤 지리산으로 옮겨가서 한벌의 옷만을 갖추고 하루에 한끼를 먹으면서 눕지도 않고 수도에 전념하였다.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충렬왕은 삼장사(三藏社)에 머물기를 명하였고, 스승인 선사 원오(圓悟)도 권고하므로 삼장사에 부임하였다.

뒤에 낭월사(朗月社)‧운흥사(雲興社)‧선원사(禪源社)의 선주(禪主)를 역임하면서 경문(經文)을 지도하고 교수하였는데, 제자가 700인에 이르렀고 사대부로서 제자가 되어 입사(入社)한 자도 많았다.

또한, 오(吳)나라의 화상 덕이(德異)만항의 글과 게송(偈頌)을 보고 칭찬하여 고담(古潭)이라는 호를 주었으며, 수십차례 서간과 게송을 주고받았다.

1313년(충선왕 5) 왕이 영안궁(永安宮)에 고승들을 모아 날마다 불법을 강론하게 하였을 때, 그를 극진한 정성으로 초빙하여 선법(禪法)을 강설하게 하자 선교의 명승들이 수없이 모였다. 바른 것을 받들어 찬양하고 잘못을 꾸짖는 것이 바람이 이는 듯하였고, 그 변론은 물이 쏟아지는 듯하였다고 전한다.

왕은 매우 기뻐하여 수레로 그를 모시고 만찬을 손수 받들었으며, ‘별전종주중속조등묘명존자(別傳宗主重續祖燈妙明尊者)’의 법호를 주었다. 그리고 가사와 의복, 은(銀) 50근을 보시하였으나 송광사로 돌아와서 모두 절에다 내놓았다.

1319년 7월에 병을 얻어 8월 18일 대중을 모은 뒤에 선상(禪床)에 올라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두 손을 마주잡은 채 미소하며 입적하였다.

이때 나이는 71세, 법랍 58세였다. 왕이 그의 부음을 듣고 애도하여 혜감국사(慧鑑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호(塔號)를 광조(廣照)라 하였다.

[참고문헌]

益齋集
朝鮮金石總覽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집필자]

이종익(李鍾益)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