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경(吳漢卿)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624D55CACBDB1242X0 |
개명(改名) | 오형(吳詗) |
자(字) | 월수(月叟) |
시호(諡號) | 문온(文溫) |
생년 | 1242(고종 29) |
졸년 | 1314(충숙왕 1) |
시대 | 고려후기 |
본관 | 해주(海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관련정보]
[상세내용]
오한경(吳漢卿)
1242년(고종 29)∼1314년(충숙왕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개명은 오형(吳詗). 자는 월수(月叟).
1260년(원종 1)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동궁시학(東宮侍學)이 되었고, 이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남경사록(南京司錄)‧중서주서(中書注書)를 역임하였다.
충렬왕 초에 첨의사인(僉議舍人)‧금녕부사(金寧府使)‧군부총랑(軍簿摠郞)‧경사교수(經史敎授)를 지냈다. 금녕부를 지킬 때 임기가 차서 군부총랑에 제수되었는데, 임명장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임기가 찼으니 머무를 수 없다 하고 떠났다.
얼마 안 있어 안렴(按廉) 유현(劉顯)이 금녕부에 있다가 도적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부중(府中)이 모두 국문을 당하였으나 홀로 면하였다.
그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08년(충선왕 즉위) 사림원학사(詞林院學事)‧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으며, 이해 왕명으로 제궁(諸宮) 및 내료(內僚)의 이름을 고치고 또 궁주(宮主)를 옹주(翁主)로 고치는 등의 일을 주관하였다.
뒤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지선부사(知選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학문이 정박(精博)하였으며, 대체(大體)를 알고 장자(長子)의 기풍이 있었으므로 여러 화요직(華要職)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온(文溫)이다.
1260년(원종 1)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동궁시학(東宮侍學)이 되었고, 이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남경사록(南京司錄)‧중서주서(中書注書)를 역임하였다.
충렬왕 초에 첨의사인(僉議舍人)‧금녕부사(金寧府使)‧군부총랑(軍簿摠郞)‧경사교수(經史敎授)를 지냈다. 금녕부를 지킬 때 임기가 차서 군부총랑에 제수되었는데, 임명장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임기가 찼으니 머무를 수 없다 하고 떠났다.
얼마 안 있어 안렴(按廉) 유현(劉顯)이 금녕부에 있다가 도적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부중(府中)이 모두 국문을 당하였으나 홀로 면하였다.
그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08년(충선왕 즉위) 사림원학사(詞林院學事)‧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으며, 이해 왕명으로 제궁(諸宮) 및 내료(內僚)의 이름을 고치고 또 궁주(宮主)를 옹주(翁主)로 고치는 등의 일을 주관하였다.
뒤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지선부사(知選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학문이 정박(精博)하였으며, 대체(大體)를 알고 장자(長子)의 기풍이 있었으므로 여러 화요직(華要職)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온(文溫)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박옥걸(朴玉杰)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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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