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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許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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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허의(許儀)
자(字)온궤(韞匱)
시호(諡號)문경(文敬)
생년1233(고종 20)
졸년1291(충렬왕 17)
시대고려후기
본관양천(陽川)
활동분야문신 > 문신
허수(許遂)

[상세내용]

허공(許珙)
1233년(고종 20)∼1291년(충렬왕 17). 고려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초명은 의(儀), 자는 온궤(韞匱).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낸 허수(許遂)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위(奇偉)하였으며, 1258년(고종 45)에 평장사(平章事) 최자(崔滋)의 문하에서 병과로 급제, 승선(承宣) 유경(柳敬)의 추천으로 최령(崔寧)원공식(元公植)과 함께 내시(內侍)로 추천되어 정사점필원(政事點筆員)이 되니,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정방3걸(政房三傑)이라 불렀다.

이후 국학박사(國學博士)에 보임되고 원종초에는 각문지후(閣門祗候)를 제수받았으며, 1267년(원종 8)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서 신종희종강종의 실록(實錄)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고, 1269년 우부승선 이부시랑 지어사대사(右副承宣吏部侍郞知御史臺事)로 진출하였다.

이때 권신 임연(林衍)이 정권을 잡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를 딸과 혼인시키려 하는 것을 거절하여 그의 미움을 샀다. 그 해 임연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옹립하였는데 이때 많은 조신(朝臣)들이 살해되었으나, 마침 처의 장례로 양천(陽川)에 가 있어서 화를 면하였다.

그뒤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를 거쳐 1275년(충렬왕 1) 감찰제헌(監察提憲)에 제수되었다.

1279년(충렬왕 5)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있을 때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위하여 전함의 건조를 명하자 경상도 도지휘사가 되어 이를 담당하였다. 당시 전라도 도지휘사 홍자번(洪子藩)이 일을 반도 마치지 않았을 때 이미 마치고 돌아오니 그 유능함에 크게 탄복하였다.

1281년(충렬왕 7)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밀직사사(密直司使)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익방(李益邦) 등 33인의 진사를 취하였다. 이어 세자조호(世子調護)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제수받았다.

이듬해 참문학세자보(參文學世子保)가 되고, 1284년(충렬왕 10)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원부(元傅)한강(韓康) 등과 더불어 『고금록(古今錄)』을 편찬하였으며, 이어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임명되었다.

1290년(충렬왕 16)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합단(哈丹)이 침입하였던바 이때 홍자번과 더불어 서울을 수비하였다. 때에 유언비어가 있어 적(賊)이 이미 가까이 들어왔다 하므로, 민심이 흉흉하여 조신들이 모두 강화로 피난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홀로 “어찌 유언비어를 믿고 마음대로 국도(國都)를 옮기리오!” 하며 반대하였다.

이듬해 원나라가 이를 토벌하려고 군사를 보내왔을 때 군사를 이끌고 이에 참여하였다.

1310년(충선왕 복위 2)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신천식(申千湜)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