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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지(冲止)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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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위원개(魏元凱)
호(號)복암(宓庵)
시호(諡號)원감(圓鑑)
생년1226(고종 13)
졸년1292(충렬왕 18)
시대고려후기
활동분야종교 > 불교인
위소(魏紹)
외조부송자옥(宋子沃)
출신지전라남도 장흥
저서『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상세내용]

충지(冲止)
1226년(고종 13)∼1292년(충렬왕 18). 고려시대 선승(禪僧). 수선사(修禪社) 제6세(世). 성은 위씨(魏氏). 속명은 원개(元凱). 본래의 법명은 법환(法桓), 뒤의 법명은 충지. 자호는 복암(宓庵). 전라남도 장흥 출신.
1. 가계와 유년시절
부친은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위소(魏紹)이며, 모친은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9세에 처음으로 취학하였는데 그 총명함이 뛰어나 경서(經書)와 자사(子史)를 쉽게 외웠으며, 17세에는 사원시(司院試)를 마쳤다.
2. 구도와 승적
19세에는 춘위(春闈)에 나아가 장원을 하였는데, 그뒤 영가서기(永嘉書記)에 부임하자 곧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뛰어난 시재(詩才)와 문장(文章)을 떨쳤고, 벼슬이 금직옥당(禁直玉堂)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선림(禪林)에 나아가 득도하기를 원하였지만 양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圓悟國師)문하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비구계를 받은 지 오래지 않아 남쪽의 여러 지방을 순력하였는데, 이는 항상 도를 얻고자 53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닌 『화엄경』 속의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본받고자 함이었다.

그가 머문 곳마다 절은 확장되었고 때때로 방장(方丈)이 될 것을 권유받았으나, 오직 선적(禪寂)에 잠기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1266년(원종 7) 여름에 원오국사의 교유(敎諭)와 조지(朝旨)로 인하여 부득이 경상남도 김해군의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되었다.

1269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다시 3년 후에는 감로사를 떠나 승주군의 수선사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보조국사(普照國師)로부터 시작된 수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을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선(禪)보다는 교(敎)에 더 치중하였다.
3. 원나라세조의 부름을 받다.
그리고 생존하던 시기가 고려를 정복하려는 원나라에 오래 저항하다가 굴복한 때였고, 감로사와 수선사에 머물렀던 때는 흉년이 계속되었으며, 수선사에 온 이듬해인 1274년 고려의 장군 김방경(金方慶)원나라 장수 흔도(炘都)탐라(耽羅)를 정벌한 해였다.

이때 원나라 세조탐라총관부(總管府)를 두고 우리나라의 전지공안(田地公案)과 별고노비천적(別庫奴婢賤籍)을 관장하게 하며 수선사에서 군량미 명목의 전세(田稅)를 거두었다.

이에 그는 세조에게 「상대원황제표(上大元皇帝表)」를 올려 빼앗겼던 전답(田畓)을 되돌려받았다.

청전표(請田表)를 올려 되돌려받은 전답은 옛적 임금이 내린 근읍(近邑)의 토지였다.

이 표에서는 새벽에는 죽 먹고 낮에는 밥 먹기가 어려운 실정인데도 군량미를 거두어갔던 그때의 어려운 서민생활, 또 흉년이 들어 전국의 승려들이 구름 모이듯 찾아와도 받을 수 없는 실정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어 당시의 사원경제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이 표는 당시의 나라 사정을 아는 데에도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 표문을 받아본 세조는 그를 흠모하여 청하는 사신을 고려에 보냈다.

고려 조정은 이를 승낙하여 1275년(충렬왕 1) 3월 그를 개경으로 불렀다.

그러나 출가하면서부터 서울에 받을 들여놓기를 꺼렸기 때문에 조정의 부름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거듭되는 조정의 부름을 사양하지 못하고 개경을 향하다가 충청도 웅천(熊川)에 이르러 병을 이유로 상경할 수 없다고 상서(上書)한 뒤 청주(淸州)로 갔다.

당시 청주목(淸州牧) 상서(尙書) 이오(李敖)는 그의 가장 친한 벗이었는데, 그를 반갑게 맞아 가까운 화정사(華井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화정사에서 여름 안거(安居)를 지내자 조정에서는 다시 불러 원나라에 가도록 하였다.

원경(元京)에 도착하자 세조는 그의 덕을 칭송하면서 빈주(賓主)와 스승의 예로 대하였으며, 원나라 백성은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

귀국할 때 세조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벽수장삼(碧繡長衫)과 흰 불자(拂子)한 쌍을 내렸다.
4. 대선사로서 입적하다.
귀국한 이듬해 충렬왕충지를 대선사로 보하였다. 그해 겨울 안거를 청주의 현암사(玄巖寺)에서 보낸 뒤, 청주 진각사(眞覺寺), 충청남도 개태사(開泰寺) 등지를 순력하였다.

1283년 11월에는 대중을 거느리고 조계산을 출발하여 원오국사가 선원사에서 수선(修繕)하여 수선사로 옮기던 거란본대장경을 도중에서 맞이하여 나누어 지고 왔고, 「단본대장경경찬소(丹本大藏經慶讚疏)」와 시를 지었다.

1284년 수선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옮겨 선정을 닦고 있던 중 1286년 2월에 원오국사가 그를 수선사의 사주(社主)로 추천하는 장문(狀聞)을 왕에게 올리고 입적하였다.

장문을 받은 충렬왕원외시랑(員外侍郞) 김호담(金浩淡)을 시켜 그로 하여금 6월 16일에 개당(開堂)하게 함에 따라 수선사의 제6세가 되었다.

그뒤 계속 수선사에 머무르다가 1271년 여름 합단적(哈丹賊)의 난을 피하여 고흥군 불대사(佛臺寺)에 잠깐 머물렀다.

1292년 1월 10일 삭발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문인(門人)들에게 “생사(生死)가 있는 것은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는 말을 남겼다.

정오가 지나자 분향하고 축원을 올린 뒤 선상(禪床)에 앉아 ‘설본무설(說本無說)’이라 설하고, 문인들이 청하는 바에 따라 “돌아보니 세상살이 67년인데, 오늘 아침 모든 일을 마쳤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탄연하여 평탄하고, 노두가 분명하니 어찌 길을 잃으랴. 손에는 겨우 하나의 대지팡이뿐이지만, 가는 길에 다리가 피로하지 않을 것이 또한 기뻐라(閱過行年六十七 及到今朝萬事畢 故鄕歸路坦然平 路頭分明未曾失 手中纔有一枝笻 且喜途中脚不倦).”라는 게송(偈頌)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법랍 39세였다.
5. 사상의 조류
불교의 삼장(三藏)에 이해가 깊었을 뿐 아니라 사림(詞林)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과 시는 당대의 유림에서도 추앙을 받았다.

자신을 가리켜 “황해(黃海)의 파강(簸糠)에 미치지 못하여 부끄러우나 단하(丹霞)의 전초(剗草)를 본받았고 남순(南詢)의 가르침을 받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도를 닦음에 있어서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오조(五祖) 홍인(弘忍)에게서 법을 인가받은 파강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였지만, 단하천연(丹霞天然)과 같이 처음 유가(儒家)에 몸을 담아 벼슬길에 나갔으나 뒤에 출가하여 선총(禪叢)에 몸담게 된 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하며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수선사 제1세였던 지눌의 순수선시대와는 달리 유학사상과 상교(相交)하는 선풍(禪風)을 풍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유사(儒士)들처럼 천명을 믿고 운명에 안주하는 유선조화(儒禪調和)의 사상조류를 보였고, 상제상천(上帝上天)의 신앙을 통하여 유도이교(儒道二敎)를 불교 속에 수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스스로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겨, 세상 밖의 초연함에 빠진듯한 느낌과 세속의 번뇌를 싫어한 인상을 풍기지만, 그의 생활은 언제나 수행승이나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던 백성들과 함께 하였다.

다만 주술적 미신에 빠져 있던 당시 불교의 구복적(求福的) 세태 속에서 오로지 수선(修禪)의 교화생활에만 몰두하며 수선사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그 뜻을 두었다.

그의 선풍은 무념무사(無念無事)를 으뜸으로 삼았고, 지관(止觀)의 수행문 중 지(止)를 중시하였으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여 지눌의 종풍(宗風)을 계승하였다.

부도(浮屠)는 송광사 남암(南庵)의 옛터 북쪽에 있으며, 입적 후 22년 만인 1314년(충숙왕 1)에 문인 정안(靜眼)진적(眞寂)신열(神悅) 등이 원감국사비를 세웠으나 그뒤 병화(兵火)를 입어 파괴되었고, 약 200년 전에 시안(時安)‧찬현(贊玄) 등에 의하여 그 자리에 중건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 1권이 남아 있으며, 『동문선』에도 시와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충렬왕원감국사(圓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참고문헌]

圓鑑國師集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韓國佛敎思想史(崇山朴吉眞博士華甲紀念論叢, 圓光大學校出版局, 1975)

[집필자]

김위석(金渭錫)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