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張鎰)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A5C77CFFFFB1207X0 |
이명(異名) | 장민(張敏) |
자(字) | 이지(弛之) |
시호(諡號) | 장간(章簡) |
생년 | 1207(희종 3) |
졸년 | 1276(충렬왕 2) |
시대 | 고려후기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상세내용]
장일(張鎰)
1207년(희종 3)∼1276년(충렬왕 2). 고려의 문신. 초명은 민(敏). 자는 이지(弛之).
창녕군리(昌寧郡吏)로 고종 때 급제한 뒤 집에서 15년을 지내다가 승평판관(昇平判官)에 임명되었다. 판관 재직시에 정적(政績)이 뛰어나 세상에 알려졌지만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옛집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안찰사 왕해(王諧)가 추천하여 직사관(直史館)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다.
원종 초에 시랑 김지석(金祗錫)과 교대로 전라도‧충청도‧경상도 3도를 안찰하고, 병부시랑‧예부시랑‧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삼별초(三別抄)가 진도에 웅거하자 경상수로방호사에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였다. 전후 8회에 걸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었으나 나라를 욕되게 한 적이 없었다.
1274년(충렬왕 즉위)에 왕이 공주와 함께 귀국할 때 몽고복장을 하고 개경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이를 만류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같은해에 일본원정군이 합포(合浦)에 돌아오게 되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서 나아가 맞아 위로하였다.
1276년에 지첨의부사 보문서태학사 수국사(知僉議府事寶文署太學士修國史)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창녕군리(昌寧郡吏)로 고종 때 급제한 뒤 집에서 15년을 지내다가 승평판관(昇平判官)에 임명되었다. 판관 재직시에 정적(政績)이 뛰어나 세상에 알려졌지만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옛집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안찰사 왕해(王諧)가 추천하여 직사관(直史館)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다.
원종 초에 시랑 김지석(金祗錫)과 교대로 전라도‧충청도‧경상도 3도를 안찰하고, 병부시랑‧예부시랑‧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삼별초(三別抄)가 진도에 웅거하자 경상수로방호사에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였다. 전후 8회에 걸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었으나 나라를 욕되게 한 적이 없었다.
1274년(충렬왕 즉위)에 왕이 공주와 함께 귀국할 때 몽고복장을 하고 개경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이를 만류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같은해에 일본원정군이 합포(合浦)에 돌아오게 되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서 나아가 맞아 위로하였다.
1276년에 지첨의부사 보문서태학사 수국사(知僉議府事寶文署太學士修國史)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강진철(姜晉哲)
대표명 | 장일(張鎰) |
성명 | 장일(張鎰) |
성명 : "장일(張鎰)"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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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