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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습명(鄭襲明)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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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형양(滎陽)
생년?(미상)
졸년1151(의종 5)
시대고려중기
본관영일(迎日)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정습명(鄭襲明)
미상∼1151년(의종 5). 고려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형양(滎陽). 영일정씨형양공파(迎日鄭氏滎陽公派)의 시조이다.

향공(鄕貢)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보임되고, 1134년(인종 2) 안흥정(安興亭) 밑의 조운(漕運)을 쉽게 하기 위하여 홍주(洪州) 소태현(蘇泰縣)에 하천을 팠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묘청(妙淸)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내시지후(內侍祗候)로서 수군을 이끌고 순화현(順化縣) 남강(南江)에서 적을 막았으며, 이어 병선판관(兵船判官)이 되어 상장군 이녹천(李祿千) 등과 함께 서적토벌(西賊討伐)을 도모하였으나 대패하였다.

1140년 김부식(金富軾)임원애(任元敱, 元厚)최자(崔滋) 등과 함께 시폐10조(時弊十條)를 올렸으나 청종되지 않자, 홀로 주언(奏言)을 좇지 않는다 하여 사직하였다.

1142년 김부식의 집에 우거하자 간관의 체통을 잃었다는 탄핵을 받아 국자사업 기거주(國子司業起居注)에서 파직되었으나 곧 예부시랑에 승진되었다.

1146년 『서경』의 「대우모(大禹謨)」를 강독하였다.

인종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종 대신에 둘째아들인 대령후(大寧侯) 경(暻)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이를 막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간관직에 있었으므로 인종승선으로 발탁하여 동궁의 스승으로 삼았으며, 죽을 때 의종을 잘 보위하라는 부탁을 하였다.

1148년(의종 2) 한림학사가 되고, 이듬해 좌승선으로 고시관이 되어 시부(詩賦)로 오광윤(吳光允), 십운시로 조정시(趙挺時) 등을 시취(試取)하였다.

1151년 추밀원지주사가 되어,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의종의 잘못을 간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고, 또한 김존중(金存中)정함(鄭諴) 등의 무리로부터 비방을 받았으며, 병이 들자 김존중이 대직(代職)을 하게 되므로 자살하였다.

『동문선』에 세태(世態)를 읊은 「석죽화(石竹花)」 등 3편의 시와 2편의 표전(表箋)이 전한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文選

[집필자]

박성봉(朴性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