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이윤보(李允甫)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774C724BCF4U9999X0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고려중기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이윤보(李允甫)
생졸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자료가 부족하여 생애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단편적으로 전하는 자료를 종합하여볼 때 진엽(陳澕)손득지(孫得之)이백순(李百順)이규보(李奎報)이인로(李仁老)최자(崔滋) 등과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보한집』에 “이윤보가 처음 과거에 합격하였을 때(李允甫初登第時)”라고 하여 과거에 합격한 사실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호칭을 ‘사관(史官)’이라고 한 사실로 보아 사관(고려시대의 관청이름)의 어느 직임을 맡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관의 관원은 대개 겸임이었으므로, 그가 다른 자료에서 ‘봉산(蓬山: 翰林院을 가리키는 말)’으로도 불리는 것으로, 한림원의 삼품관 이하로서 사관의 수찬관을 맡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규보가 “영위한 재주로 봉산의 관서에 있으면서 일찍이 역사를 편수하여 만세에 전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라고 말한 사실은 이것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진엽의 전기인 「매호공소전(梅湖公小傳)」에 의하면 “강종(康宗)임신년에 진엽손득지이윤보 등과 함께 사륜(絲綸, 詔勅)을 관장하였다. ”고 한 점으로 보아 1212년에 이러한 직임을 맡았음도 알 수 있다.

또, 이규보가 거제에 부임하는 이윤보를 전송하는 편지를 쓴 것으로 보아 사관을 맡은 이후에 거제의 지방관으로도 나갔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동관(東館)으로도 불렸는데, 동관이 한나라 궁중의 서고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으로 보아 이와 관련된 또다른 직임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학식이 매우 정박(精博)하고 시문은 모두 근원이 있었다고 하며, 임춘(林椿)과 더불어 간결하고 고아(古雅)하며, 정교하고 빼어났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평생에 두시(杜詩)를 좋아하여 때때로 “전쟁이 늙은 선비를 떠나 보낸다(干戈送老儒).”라는 구절을 읊조려 감상하면서, 이 말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말이 간절하니, 보통사람은 지을 수 없는 시라고 하였다.

작품으로는 이규보의 「국수재전(麴秀才傳)」을 본떠 게를 의인화하여 「무장공자전(無腸公子傳)」을 지었는데, 이규보가 이것을 보고 매우 칭찬하고 문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늘 말하기를, “요즈음 글 잘하는 사람을 얻었으니, 이윤보는 진짜 훌륭한 사관의 재질을 가졌다.”라고 하였다.

이밖에 진엽옥당에서 숙직하면서 지었다는 「유월궁편(遊月宮篇)」이 『보한집』에 전한다.

그런데 이규보이윤보의 시 끝에 발한 글을 보면,“나의 벗 이윤보가 일찍이 저술한 시‧부와 잡저 50여편을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와서 보였다. ”라는 구절로 보아 많지는 않으나 자찬의 문집이 있었던듯하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東國李相國集
梅湖遺稿
破閑集
補閑集

[집필자]

윤호진(尹浩鎭)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