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궤(李軌)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74ADA4FFFFD1122X0 |
이명(異名) | 이재(李載) |
자(字) | 공제(公濟) |
시호(諡號) | 문간(文簡) |
생년 | ?(미상) |
졸년 | 1122(예종 17) |
시대 | 고려중기 |
본관 | 청주(淸州)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이유적(李攸績) |
[상세내용]
이궤(李軌)
미상∼1122년(예종 17).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재(載), 자는 공제(公濟). 예부시랑(禮部侍郞) 이유적(李攸績)의 아들이다.
선종 때 소부주부(少府注簿)로서 왕의 명을 받아 송나라에 보내는 표문(表文)을 교정하면서 잘못하여 요나라의 연호 대안(大安)을 사용하여 그 표문이 송나라에서 되돌아오자 이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1101년(숙종 6) 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때 일행중 공목관(孔目官) 이복(李復)이 의천(義天)의 청으로 금종(金鐘)을 요나라에 바친 일이 문제가 되어 귀국 후 형부(刑部)의 탄핵을 받아 그것을 막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파면을 당하였다.
1117년(예종 12) 추밀원사(樞密院使)가 되었다가 뒤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고, 다시 정당문학 판한림원사 겸 태자소부(政堂文學判翰林院事兼太子少傅)가 되었다.
이듬해 호부상서판예부사(戶部尙書判禮部事)가 되었고, 1119년 수국사(修國史)가 되었으며, 뒤이어 수사공 참지정사(守司空參知政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선종 때 소부주부(少府注簿)로서 왕의 명을 받아 송나라에 보내는 표문(表文)을 교정하면서 잘못하여 요나라의 연호 대안(大安)을 사용하여 그 표문이 송나라에서 되돌아오자 이에 연좌되어 파면되었다.
1101년(숙종 6) 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때 일행중 공목관(孔目官) 이복(李復)이 의천(義天)의 청으로 금종(金鐘)을 요나라에 바친 일이 문제가 되어 귀국 후 형부(刑部)의 탄핵을 받아 그것을 막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파면을 당하였다.
1117년(예종 12) 추밀원사(樞密院使)가 되었다가 뒤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고, 다시 정당문학 판한림원사 겸 태자소부(政堂文學判翰林院事兼太子少傅)가 되었다.
이듬해 호부상서판예부사(戶部尙書判禮部事)가 되었고, 1119년 수국사(修國史)가 되었으며, 뒤이어 수사공 참지정사(守司空參知政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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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