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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존(金仁存)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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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처후(處厚)
시호(諡號)문성(文成)
생년?(미상)
졸년1127(인종 5)
시대고려중기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상기(金上琦)
공신호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

[상세내용]

김인존(金仁存)
미상∼1127년(인종 5). 고려 중기의 문신‧학자. 초명은 김연(金緣), 자는 처후(處厚). 신라 선덕왕 때의 상대등(上大等)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으로, 부친은 문정공(文貞公) 김상기(金上琦)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선종헌종숙종의 삼대에 걸쳐 내시직(內侍職)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밖으로 보직되기를 간청하여 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을 거쳐 개성부사가 되었으며, 다시 기거사인지제고(起居舍人知制誥)에 올랐다. 이어 기거랑(起居郞)이 되었으나, 왕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어 병부원외랑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시를 잘하여 1102년(숙종 7)에 요나라 사신 맹초(孟初)가 오자 그의 접대를 맡아 시로써 응접하여 맹초를 놀라게 하였다. 그 일이 있은 뒤 이부낭중(吏部郞中)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를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올랐고, 1105년에 숙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요나라에 갔다와서 예부시랑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

1107년(예종 2)에 윤관(尹瓘)을 원수로 삼아 여진을 정벌할 때 이를 극력 반대하였고, 또 1109년 여진이 구성의 환부를 요구하자 방위상의 난점과 북방백성들의 희생을 들어 그 환부를 주장하여 이를 실시하게 하였다.

1101년 비서감(祕書監)에 올라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그뒤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승지(承旨), 병부‧예부‧호부의 상서, 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상주국(上柱國)에 올랐다.

1117년 판서북면병마사(判西北面兵馬事)가 되었는데, 요나라금나라와 싸우다가 내원성(來遠城)포주성(抱州城)을 돌려주자 그곳을 수복하고 의주(義州)를 두었다. 그해 왕이 청연각(淸讌閣)에서 연회를 베풀고 그로 하여금 청연각기를 짓게 하고,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홍관(洪瓘)으로 하여금 이것을 돌에 쓰게 했다.

이듬해 판동북면병마사(判東北面兵馬事) 겸 행영병마사(行營兵馬事)가 되었다. 인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이자겸(李資謙)이 권세를 잡고 횡포를 부리므로, 화가 미칠까 두려워 물러나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으므로 스스로 말에서 떨어져 돌아와 누워서 다시 물러나기를 간청하여 재상은 해직되고 그 대신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임명되었다.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뒤 1126년에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이 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사(檢校太師) 문하시중(門下侍中) 감수국사(監修國史) 상주국(上柱國)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었다.

이때 금나라 군사가 송나라 변경을 침공했는데, 변방의 보고가 잘못되어 금나라송나라에게 패배했다 하므로,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 등이 군사를 내어 송나라에 응하여 금나라를 치자고 주장했으나 반대하였다.

1127년에 수태부(守太傅)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이부사(判吏部事)에 기용되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늙어서도 책을 놓지 않았고, 그 당시의 조고(詔誥)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또한, 최선(崔璿)이재(李載)이덕우(李德羽)박승중(朴昇中) 등과 더불어 음양지리서인 『해동비록(海東秘錄)』을 지었고, 박승중과 더불어 『시정책요(時政策要)』를 지었으며,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주석을 붙였다. 아들로는 김영석(金永錫)김영윤(金永胤)김영관(金永寬)이 있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