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任濡)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784C720FFFFB1149X0 |
이명(異名) | 임극인(任克仁) |
시호(諡號) | 양숙(良淑) |
생년 | 1149(의종 3) |
졸년 | 1212(강종 1) |
시대 | 고려중기 |
본관 | 장흥(長興) |
활동분야 | 관료 > 명신 |
부 | 임원후(任元厚) |
[상세내용]
임유(任濡)
1149년(의종 3)∼1212년(강종 1). 고려의 명신(名臣). 본관은 장흥(長興). 초명은 임극인(任克仁).
수상을 지낸 임원후(任元厚)의 넷째아들이며, 인종의 비인 공예태후(恭睿太后)와는 남매가 된다. 문음(門蔭)으로 진출한 뒤 명종초에 과거에 급제하고, 1187년(명종 17)에 예부시랑으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좌승선을 거쳐 참지정사가 되고, 1197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에 이르러 20년 가까운 기간 재상의 자리에 있었다.
특히, 세 차례의 지공거와 한 차례의 동지공거를 역임하여 모두 네 차례나 과거를 주관하여 조충(趙沖)‧이규보(李奎報)‧김창(金敞) 등 많은 재추(宰樞)를 문생으로 두어 큰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또한, “제고(制誥) 16년에 일시의 고문‧대책(高文大冊)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라고 할만큼 대단한 문장가였으며, ‘가세(家世)‧세위(勢位)를 가지고 남에게 교만하지 않은’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희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양숙(良淑)이다.
수상을 지낸 임원후(任元厚)의 넷째아들이며, 인종의 비인 공예태후(恭睿太后)와는 남매가 된다. 문음(門蔭)으로 진출한 뒤 명종초에 과거에 급제하고, 1187년(명종 17)에 예부시랑으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좌승선을 거쳐 참지정사가 되고, 1197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에 이르러 20년 가까운 기간 재상의 자리에 있었다.
특히, 세 차례의 지공거와 한 차례의 동지공거를 역임하여 모두 네 차례나 과거를 주관하여 조충(趙沖)‧이규보(李奎報)‧김창(金敞) 등 많은 재추(宰樞)를 문생으로 두어 큰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또한, “제고(制誥) 16년에 일시의 고문‧대책(高文大冊)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라고 할만큼 대단한 문장가였으며, ‘가세(家世)‧세위(勢位)를 가지고 남에게 교만하지 않은’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희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양숙(良淑)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李相國集
補閑集
破閑集
高麗時代의 定安任氏‧鐵原崔氏‧孔巖許氏家門分析(朴龍雲, 韓國史論叢 3, 1978)
高麗史節要
東國李相國集
補閑集
破閑集
高麗時代의 定安任氏‧鐵原崔氏‧孔巖許氏家門分析(朴龍雲, 韓國史論叢 3, 1978)
[집필자]
박용운(朴龍雲)
성명 : "임유(任儒)"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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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