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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모(閔令謨)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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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諡號)문경(文景)
생년1115(예종 10)
졸년1194(명종 24)
시대고려중기
본관여흥(驪興)
활동분야문신 > 문신
민의(閔懿)

[상세내용]

민영모(閔令謨)
1115년(예종 10)∼1194년(명종 24). 고려 명종 때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호부원외랑 민의(閔懿)의 아들이며, 동생은 민사충(閔嗣忠)이다.

1138년(인종 16) 문과에 응시하여 지은 부(賦)가 율격(律格)에 맞지 않아 동지공거(同知貢擧)이지저(李之氐)의 반대가 있었지만, 부편(賦篇)이 낙낙(落落)하나 기개가 있다는 지공거 최유(崔濡)의 주장으로 합격된 뒤 누천(累遷)하여 이부원외랑이 되었다.

1175년(명종 5) 형부시랑으로 고시관이 되어 승구원(承丘源)방희진(方希進) 등을 합격시켰다. 명종잠저(潛邸)에 있을 때 꿈에 본 재상과 닮았다고 하여 추밀원부사에 탁용되었다. 이해에 지공거가 되어 백용변(白龍變) 등을 시취(試取)하였다.

1178년 판병부사에 올라 어사대의 탄핵이 있었으나 스스로 병부의 전주(銓注)에 대한 중서문하성중방의 사례를 들어 반박 탄핵하니, 중서문하성중방이 동조하여 도리어 어사대를 탄핵하였다. 정중부(鄭仲夫)가 치사(致仕)하자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으나 왕이 무인 송유인(宋有仁)을 그 위에 반열(班列)하도록 하였다. 송유인의 사양으로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고, 이듬해 동중서시랑평장사 판이부사(同中書侍郞平章事判吏部事)태자태사(太子太師)를 역임하였다.

1180년 중건한 강안전(康安殿) 문액(門額)을 향복(嚮福)이라 하였는데 항복과 음이 비슷하다는 무인들의 반발로 영희(永禧)라고 고쳐 올렸으나, 이것도 채택되지 않고 중방의 칭호를 빌린 중희(重禧)로 결정되었다.

이어 문하시랑평장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이득옥(李得玉, 李仁老) 등을 시취하였다.

1181년 총재직(冢宰職)에 있으면서 전주가 크게 어긋났다.

이때 낭사(郞舍)의 지방관 재직연한에 기준한 인사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상소가 있었으며, 최충렬(崔忠烈)한문준(韓文俊)의 노력으로 무마되었다.

1183년 70세가 못되었으나 이광정(李光挺) 등의 압력으로 치사하는바 되었다.

성품이 겁눌(怯訥)하고 조행(操行)에 결점이 있었으며, 정병(政柄)을 맡고서는 청탁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져 인사행정이 바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박성봉(朴性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