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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첨(尹鱗瞻)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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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태조(胎兆)
시호(諡號)문정(文定)
생년1110(예종 5)
졸년1176(명종 6)
시대고려중기
본관파평(坡平)
활동분야문신 > 문신
윤언이(尹彦頤)

[상세내용]

윤인첨(尹鱗瞻)
1110년(예종 5)∼1176년(명종 6).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태조(胎兆).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윤언이(尹彦頤)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한 뒤 의종시어사(侍御史)가 되었으나 일을 논하다가 고관의 뜻에 거슬려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 좌천되었다.

1153년(의종 7)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기거주(起居注)가 되었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던 궁인 무비(無比)의 사위 최광균(崔光均)이 정8품에 임명되고 식목록사(式目錄事)를 겸하게 되자 사대부들이 모두 분하게 여겼는데, 왕의 독촉을 두려워한 나머지 간관으로서 여기에 서경(署經)하여 비웃음을 샀다.

1165년 형부시랑으로 서북면병마부사가 되었는데, 그때 의 군사가 침입하여 정주(靜州: 의주)방수별장(防守別將) 원상(元尙) 등 16인을 잡아가자, 의주판관 조동희(趙冬曦) 등과 은밀히 상의하여 첩문(牒文)을 금의 대부(大夫) 영주(營主)에게 보내어 잡혀간 사람들을 돌려받았으나, 이를 왕에게 숨기고 알리지 않았다.

1169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고, 이듬해 명종이 즉위하자 국자감대사성이 되었다가 곧 참지정사 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1172년(명종 2) 동북면병마판사 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東北面兵馬判事行營兵馬兼中軍兵馬判事)가 되었다.

이듬해 김보당(金甫當)이 반기를 들자 이의방(李義方)이 그가 김보당과 모의하였을 것이라 의심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유응규(庾應圭)의 힘을 입어 면하게 되었으며, 뒤이어 상장군을 겸하여 중방(重房)에 참여하게 되고 수태사(守太師)의 벼슬이 가하여졌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반기를 들자 원수가 되어 3군을 거느리고 서경을 치게 되었으나 절령(岊嶺: 慈悲嶺)에서 패하였다. 다시 원수가 되어 부원수 기탁성(奇卓成), 좌군병마사 진준(陳俊), 우군병마사 경진(慶珍), 중군병마사 최충렬(崔忠烈) 등과 더불어 서경을 쳐서 1176년 이를 평정하고 조위총을 죽였다. 그 공으로 추충정란광국공신 상주국 감수국사(推忠靖亂匡國功臣上柱國監修國史)에 올랐다.

무신정권이 서고나서는 무신들과 일을 함께 하였으나 그들에게 견제되어 유약하게 스스로를 보존하는 데 그쳤다.

죽은 뒤 수태사 문하시중(守太師門下侍中)이 증직되었다.

또한, 그의 아들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그 처에게는 나라에서 상을 내리어 매년 녹(祿)을 주었다.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