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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鄭仲夫)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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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106(예종 1)
졸년1179(명종 9)
시대고려중기
본관해주(海州)
활동분야무신 > 무신
공신호벽상공신(壁上功臣)

[상세내용]

정중부(鄭仲夫)
1106년(예종 1)∼1179년(명종 9). 고려의 무인. 본관은 해주(海州).

처음에 주(州)의 군적(軍籍)에 오르고, 개성으로 와 공학금군(控鶴禁軍)에 편입되었다가 인종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었다.

이때 왕이 참석한 가운데 제석(除夕)의 나례(儺禮)가 베풀어졌는데, 그 자리에서 나이 어린 내시 김돈중(金敦中)이 촛불로 그의 수염을 태우므로 크게 노하여 김돈중을 묶어 놓고 욕보였다.

이 때문에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金富軾)의 노여움을 샀으나 왕의 중재로 무사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신과 문신간의 대립이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인종의 신임을 받아 근시(近侍)하였고, 의종초에 교위(校尉)가 되었다.

이때 산원(散員) 사직재(史直哉)와 더불어 봉쇄된 수창궁(壽昌宮)의 북문을 함부로 출입하다가 어사대의 탄핵을 받았으나 다시 왕의 중재로 무사하였다.

그뒤 벼슬이 올라 상장군이 되었다.

이때 의종은 음탕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주연을 베풀 때마다 문신은 함께 즐기고 무신들은 그 경비만을 맡아 허기와 추위에 떨었으므로 무신들 사이에 불만이 많았다.

1170년(의종 24)에 의종이 화평재(和平齋)에 행차하였을 때 견룡행수(牽龍行首)산원 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과 함께 반역을 결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뒤 왕이 연복정(延福亭)에서 흥왕사(興王寺)를 거쳐 보현원(普賢院)에 이르자 왕을 따라갔던 문신과 환자(宦者) 등을 살해하였다. 보현원에서 반란에 성공하자 곧바로 개성으로 들어가 궁궐과 태자궁을 휩쓸면서 대소의 문신 50여명을 죽이고 왕을 거제현(巨濟縣: 거제도)으로, 태자를 진도현(珍島縣: 진도)으로 추방하고, 왕의 아우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맞아 왕(명종)을 삼음으로써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다.

정중부의종의 곽정동택(藿井洞宅)‧관북택(館北宅)‧천동택(泉洞宅) 등 네 사저와 거기에 축적하였던 수많은 재물을 이의민이고 등과 나누어 차지하였다. 그리고 문관직인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고 뒤이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으며, 훈(勳) 1등에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다.

1172년 서북면판사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西北面判事行營兵馬兼中軍兵馬判事)가 되었다.

이듬해 김보당(金甫當)이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의종을 복위시키려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고 김보당의 잔당 장순석(張純錫)유인준(柳寅俊)을 따라 경주까지 왔던 의종이의민(李義旼)을 시켜 살해하였다.

또, 김보당이 죽음을 당할 때 모든 문신과 함께 꾀하였다는 거짓 진술을 듣고 그동안 화를 면하였던 모든 문신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준의(李俊儀)진준(陳俊) 등의 만류로 중지하였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을 타도하려고 난을 일으키자 3년만에 이를 평정하였다.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던 해에 문하시중이 되었는데 재물에 탐을 내어 남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農莊)을 소유하였고, 가동(家僮)과 문객(門客)들도 주인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일삼았다.

1175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1178년에 치사(致仕)하였다.

1179년(명종 9) 경대승(慶大升)에게 아들 정균(鄭筠), 사위 송유인(宋有仁) 등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武人政權硏究(金塘澤, 새문社, 1987)
鄭仲夫(李宗馥,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80)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대표명정중부(鄭仲夫)
중부(仲夫)
성명정중부(鄭仲夫)

성명 : "정중부(鄭仲夫)"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歷代總要v03諱晛字日升丁未生仁宗太子宋高宗紹興十六年丙寅受禪庚寅爲鄭仲夫所廢放于巨濟癸巳被弑在位二十四年壽四十七葬禧陵○母恭睿王后○妃莊敬王后宗室江陵公溫女莊宣王后崔氏參政
國朝編年v12刑汝立屍于軍器寺前徒黨悉伏誅告廟頒赦○汝立者其父希曾世居全州南門外娶妻于金溝縣因居汝立初孕時其父夢見鄭仲夫生時又如之故親舊來賀而其父無喜色年七八與群兒嬉剉鵲雛從觜至趾其父問曰誰所爲也兒中汝立使喚婢子先答曰某
東國歷代總目v01弟大寧侯暻於天安府○王素信圖讖不友諸弟密諭臺諫劾流暻恐太后救暻先遷之甲申遣使如宋○庚寅王幸普賢院武臣鄭仲夫李義芳等作亂大殺文官以王還宮○初金敦中以富軾之擢科第一年少氣銳因除夕儺禮以燭燃鄭仲夫髯仲夫嗛敦中至是
大東遺事v1后於普濟寺王素信譖而不友諸弟嘗以譖言流遷太后弟大寧君於天安太后救之遂遷太后○庚寅王幸普賢院武臣鄭仲夫李義方等作亂大殺文官初金富軾子敦中擢魁科年少氣銳嘗因儺禮誤以燭火燃仲夫鬚仲夫嗛之時王荒淫好遊
大東遺事v1明宗名皓仁宗次子爲鄭仲夫所立元年辛卯宋孝宗乾道六年○癸巳金甫當起兵討鄭仲夫不克仲夫執甫當問其預謀甫當誣云諸文臣孰不預謀
待闡錄v10悖於人而爲時烈者必以朱語之如是爲言朱子易簀在於聖祖開國之前百九十二年矣朱子何能逆揣而言耶當高麗毅宗時鄭仲夫李義方之輩擅權一國放弑其君而攷其年歲正値朱子之中身則語類云者必指此賊之亂逆而風聞爽實不無錯誤之端有如
東史撮要v1王南原遣其弟資德諭之乃赴卽還立養賢庫於國學歷仁宗 至毅宗金敦中 以富軾 之子早顯氣勝除夕因儺戲以燭燃鄭仲夫 髥及王幸普賢院與文士賦詩酣飮扈從將士皆飢困仲夫 等大恨之矯旨聚兵凡戴文冠者盡殺之投澤中敦中逃匿紺嶽
寒臯觀外史v22隄爲湖人甚苦之二十四年自延福亭将幸普濟寺駕近普賢院鄭仲夫李髙李義方䓁作亂盡殺扈従諸臣及在京文臣初仲夫爲牽龍除夕儺禮王臨視交躍爲樂內侍金敦中以燭燃仲夫鬚仲夫辱
朝鮮歷史v2和平齋에幸야近幸文臣으로더부러觴詠야忘返니扈從將士ㅣ飢甚지라牽龍散員李義方과李高의等이上將軍鄭仲夫더러謂야오대文臣은晬飽고武臣飢困니이可히忍랴仲夫ㅣ일즉이金敦中의燃鬚憾이有지라이에더
朝鮮歷史v2鞠야殺之니臨死에誣야오대무릇文臣이뉘가여긔謀□ㅣ치안니리오一切誅戮야文士ㅣ□盡다○鄭仲夫ㅣ李義旼으로야곰前王을弑다
朝鮮歷史v2紀元前二白己十三年己亥에將軍慶大升이본대鄭仲夫等의爲바憤야銳意야討之랴야善바牽龍許升으로더부러約고□經會畢夜四鼓에升이鄭
朝鮮歷史v2紀元前二百一八年甲午에西京留守趙位寵이써鄭仲夫의等을討므로爲名고起兵니臣嶺北의四十餘城이다應之거平章事尹鱗瞻을遣야三軍을將야擊之
朝鮮歷史v2다應之거平章事尹鱗瞻을遣야三軍을將야擊之다○李義方이兇恣ㅣ日甚야同列이만히殺害被거鄭仲夫ㅣ禍가及己外慮야社門고出치아니니仲夫의子筠이西京의從軍僧徒誘야義方을斬고그黨與捕야
國朝人物志v2字仁伯東萊人僉正希曾子孕時父夢見鄭仲夫生時又如之故舊來賀而父無喜色年七八歲與群兒嬉剉鵲雛從嘴至趾父問曰誰所爲婢子曰汝立也父怒叱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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