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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함(崔諴)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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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화(子和)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094(선종 11)
졸년1160(의종 14)
시대고려중기
본관한남(漢南)
활동분야문신 > 문신
최계방(崔繼芳)

[상세내용]

최함(崔諴)
1094년(선종 11)∼1160년(의종 1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한남(漢南). 자는 자화(子和). 수사공 상서우복야 참지정사 판삼사사(守司空尙書右僕射參知政事判三司事) 최계방(崔繼芳)의 아들이다.

12세 때 음보(蔭補)로 양온동정(良醞同正)이 되고, 1114년(예종 9) 과거에 급제한 뒤 내시(內侍)가 되었다.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1125년(인종 3)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가 되었다.

이듬해 중서성에 있을 때 이자겸(李資謙)이 반란을 일으키자 국새(國璽)를 가지고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시종했으며, 난이 평정된 뒤 좌정언이 되었다.

1131년 좌사간(左司諫)으로 우간의(右諫議) 이신(李伸) 등과 함께 동경지례사(東京持禮使) 서장관(書狀官) 최봉심(崔逢深)은 본래 무거인(武擧人)이고 광망하여 사신에 적격이 아니므로 바꾸어야 한다고 상주했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이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거쳐 1140년에 예부시랑한림시독학사(禮部侍郞翰林侍讀學士)만수절사(萬壽節使)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이해에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여 한재(韓梓) 등을 시취(試取)하였다.

이듬해에 차예부상서(借禮部尙書)로서 지서경유수사(知西京留守事)가 되고, 좌간의대부 사재경 수문전학사(左諫議大夫司宰卿修文殿學士)를 역임하였다.

114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이인실(李仁實)과 함께 황문부(黃文富) 등을 시취하였다.

1148년(의종 2) 우상시(右常侍)로서 중서사인(中書舍人) 최윤의(崔允儀)와 함께 내시 김거공(金巨公)과 환자(宦者) 지숙(之淑) 등을 탄핵하여 축출한 뒤 벼슬이 개수(改授)되어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이 되었다.

이듬해 공부상서(工部尙書)를 거쳐 1150년 병부상서, 이듬해에 지추밀원사판삼사사(判三司事), 1152년 추밀원사를 역임하였다.

1157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1160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죽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박성봉(朴性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