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유(朴挺蕤)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BC15C815C720B1089X0 |
시호(諡號) | 충질(忠質) |
생년 | 1089(선종 6) |
졸년 | 1145(인종 23) |
시대 | 고려중기 |
본관 | 죽산(竹山) |
활동분야 | 무신 > 무신 |
부 | 박영후(朴永侯) |
[상세내용]
박정유(朴挺蕤)
1089년(선종 6)∼1145년(인종 23). 고려의 무신. 본관은 죽산(竹山). 박영후(朴永侯)의 아들이다.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경원군판관(慶源郡判官)이 되었다. 인종 때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1132년(인종 10) 합문(閤門)에 엎드려 상소하여 3일 동안이나 시사(時事)를 말하는 등 왕의 뜻에 거슬려 인주(仁州: 지금의 仁川)의 지사로 좌천되었다.
당시 공과(功課)가 최상이 되므로 발탁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으며, 그 뒤 20여 년 동안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조정의 일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1138년에 잡단(雜端)으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최관(崔灌), 시어사 인의(印儀) 등과 함께 추밀사(樞密使) 진숙(陳淑)이 묘청(妙淸)의 난으로 서경을 칠 때, 남의 노비와 보대(寶帶)를 뇌물로 받은 것을 탄핵하여 파직하게 하였다.
뒤에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고, 추밀원부사 겸 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었다.
진퇴가 단아하고 응대(應對)가 명빈하였다. 시호는 충질(忠質)이다.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경원군판관(慶源郡判官)이 되었다. 인종 때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1132년(인종 10) 합문(閤門)에 엎드려 상소하여 3일 동안이나 시사(時事)를 말하는 등 왕의 뜻에 거슬려 인주(仁州: 지금의 仁川)의 지사로 좌천되었다.
당시 공과(功課)가 최상이 되므로 발탁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으며, 그 뒤 20여 년 동안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조정의 일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
1138년에 잡단(雜端)으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최관(崔灌), 시어사 인의(印儀) 등과 함께 추밀사(樞密使) 진숙(陳淑)이 묘청(妙淸)의 난으로 서경을 칠 때, 남의 노비와 보대(寶帶)를 뇌물로 받은 것을 탄핵하여 파직하게 하였다.
뒤에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고, 추밀원부사 겸 태자빈객(太子賓客)이 되었다.
진퇴가 단아하고 응대(應對)가 명빈하였다. 시호는 충질(忠質)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史節要
[집필자]
민병하(閔丙河)
대표명 | 박정유(朴挺蕤) |
명 | 정유(挺㽔) |
명 : "정유(挺㽔)"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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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