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김부일(金富佾)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E40BD80C77CB1071X0
자(字)천여(天與)
시호(諡號)문간(文簡)
생년1071(문종 25)
졸년1132(인종 10)
시대고려중기
본관경주(慶州)
활동분야학자 > 유생
김근(金覲)

[상세내용]

김부일(金富佾)
1071년(문종 25)∼1132년(인종 10). 고려 중기의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천여(天與).

부친은 선종 때의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를 지낸 김근(金覲)이며, 형은 김부필(金富弼), 동생으로는 김부식(金富軾)김부의(金富儀)가 있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고, 추밀원사(樞密院使) 왕가(王嘏)를 따라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문(名文)을 지음으로써 송나라 철종(哲宗)의 찬사를 받았다. 숙종습유지제고(拾遺知制誥)를 거쳐 원주상주의 지방관을 역임하여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예종예부낭중이 되었는데, 요나라가 여진을 치려고 원병을 청하여오자 군신들이 모두 이에 찬성하였으나 그는 김부식,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한충(韓冲), 위위소경(衛尉少卿) 척준경(拓俊京) 등과 함께 윤관(尹瓘)이 여진정벌을 한 뒤라 군민(軍民)의 휴식을 위해서도 불가하며 다른 나라를 위하여 발병(發兵)하는 것이 국익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였다.

국자사업기거주(國子司業起居注)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가 되어, 왕과 유신들에게 경사(經史)를 강론함으로써 문명을 크게 떨쳤다.

사람됨이 관후하고 문장에 능하여, 모든 사명(辭命)을 맡아 윤색하였다고 한다. 팔관회의 송사(頌詞)와 구호(口號)를 지으니, 예종은 물론 송나라의 왕도 칭찬하였다.

또한, 동생 김부식김부철과 함께 예종을 문한(文翰)으로 시종하게 함으로써, 그의 모친은 대부인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122년 인종의 즉위와 함께 동지추밀원사 정당문학 한림학사승지(同知樞密院事政堂文學翰林學士承旨)가 되고, 1127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1130년 풍허병(風虛病)으로 사직을 청하니, 수태위 개부의동삼사 비서성사 주국(守太尉開府儀同三司祕書省事柱國)으로 개수(改授)되었다.

검교 태보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상서예부사상주국(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尙書禮部事上柱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집필자]

박성봉(朴性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