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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학린(吳學麟)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C624D559B9B0B1009X0
생년1009(목종 12)
졸년?(미상)
시대고려중기
본관고창(高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상세내용]

오학린(吳學麟)
1009년(고려 목종 12)∼미상. 본관은 고창(高敞).

고창오씨(高敞吳氏)의 시조이다.

고려 정종(靖宗)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문헌공도(文憲公徒)로 지공거전시(知貢擧典試)에서 급제하여 당시 학자들이 선망하던 청요직(淸要職)인 한림태학사(翰林太學士)를 지냈다.

1057년(문종 11) 북방 국경인 압록강(鴨綠江) 일대에서 거란족의 침노가 심해 소란할 때 그 곳 사목(司牧)으로 발탁되어 그 지방을 평정(平定)하고 민심과 생업(生業)을 안정시키는 큰 공을 세워 고창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으니, 후손들이 고창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아들 오질(吳質) 또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고, 손자 복양공(濮陽公) 오세문(吳世文)은 승보시(陞補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동각시학(東閣侍學)을 지냈으며, 오세문의 형 오세공(吳世功)과 동생 오세재(吳世才)도 당대에 이름난 학자였는데 특히 오세재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李仁老) 등과 교우관계를 돈독히 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오학린(吳學麟)은 문교부흥에 전력하였으며 문장이 전아(典雅)한 많은 시(詩)와 저술이 있다고 『동인문집(東人文集)』, 『삼한귀감(三韓龜鑑)』 등에 기록이 있으나 모두 산일(散逸)되고, 『동문선(東文選)』에 장(狀) 「재걸 추훼 압강성교 궁구장(再乞抽毁鴨江城橋弓口狀)」과 오언율시(五言律詩) 「구룡산 흥복사에 거듭 놀면서[重遊九龍山興福寺]」가 전해질 뿐이다.

고창향현사(鄕賢祠), 황해도 평산(坪山)죽림사(竹林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東國輿地勝覽
朝鮮人名辭書

[집필자]

김동섭
수정일수정내역
2008-12-31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