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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술희(朴述熙)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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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박술희(朴述希)
시호(諡號)엄의(嚴毅)
생년?(미상)
졸년945(정종 즉위)
시대고려전기
본관면천(沔川)
활동분야무신 > 무신
박득의(朴得宜)

[상세내용]

박술희(朴述熙)
미상∼945년(정종 즉위). 고려초의 무신. 혜성군(櫘城郡) 사람. 면천박씨(沔川朴氏)의 시조. 일명 술희(述希). 대승 박득의(朴得宜)의 아들이다. 용감하였으며 육식을 좋아하여 비록 두꺼비‧개미라도 모두 먹었다 한다. 18세에 궁예의 위사(衛士)가 되었으나, 뒤에 태조를 섬겨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워 대광이 되었다.

921년(태조 4) 태조장화왕후(莊和王后)의 소생인 맏아들 무(武: 惠宗)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그 어머니 집안의 세력이 미약하여 태자 책봉이 어려울까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오래된 상자에 자황포(柘黃袍:태자가 입는 옷)를 담아 오씨에게 주었다. 오씨가 이것을 박술희에게 보이니 그는 태조의 뜻을 알고 를 태자로 삼을 것을 청하여 그대로 되었다.

태조가 임종할 때 군국(軍國)의 일과 태자를 새 왕으로 옹립, 보좌할 것을 유언받고 또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다.

그러나 당시 광주(廣州) 지방의 강력한 호족 출신이며 외척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던 왕규(王規)와 적대관계에 있었으므로, 자기 자신의 신변보호마저 힘들 정도였다. 그리하여 항상 군사 100여명으로 자신을 호위하게 하니 정종(定宗)이 그가 딴 뜻이 있음을 의심하여 갑곶(甲串)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고려사』 「박술희전」에 의하면, 왕규가 왕명이라고 속여 그를 죽였다고 되어 있으나 당시 왕규 자신도 갑곶에 유배되었다가 곧 살해되었으므로 그 기록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아마도 정종이 그를 죽이고, 그 살해의 책임을 왕규에게 전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추증되었으며, 혜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아들로 정원(精元)이 있다. 뒤에 엄의(嚴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豪族과 王權(河炫綱, 한국사 4, 1974)

[집필자]

하현강(河炫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