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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崔冲)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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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호연(浩然)
호(號)성재(惺齋)
호(號)월포(月圃)
호(號)방회재(放晦齋)
시호(諡號)문헌(文憲)
생년984(성종 3)
졸년1068(문종 22)
시대고려전기
본관해주(海州)
활동분야문신 > 문신
최온(崔溫)
공신호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
공신호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
공신호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

[상세내용]

최충(崔冲)
984년(성종 3)∼1068년(문종 22). 고려의 문신.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인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창시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최온(崔溫)의 아들이다.
1. 관력
1005년(목종 8)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우습유(右拾遺)에 올랐고, 1013년(현종 4)에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의 문적을 재편수하는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하여 『칠대실록(七代實錄)』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뒤 우보궐(右輔闕)기거사인(起居舍人)중추직학사(中樞直學事)를 역임하고, 1025년에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고(翰林學士內史舍人知制誥)를 거쳐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郞諫議大夫)에 올랐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說苑)』 육정육사(六正六邪)의 글과 한(漢)의 자사6조(刺史六條)의 글을 각 관청에 붙이게 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뒤 형부상서 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로 전임되었으며, 정종초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037년(정종 3) 참지정사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현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또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판서북로병마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判西北路兵馬使)로 변경에 나가 영원(寧遠)평로(平虜) 등에 진(鎭)을 설치하는 등 국방에도 힘썼다.

변경에서 돌아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올랐고, 수사도 수국사 상주국(守司徒修國史上柱國)이 더해졌다가 곧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옮겼다. 문종이 즉위하여 문하시중이 되자 율령서산(律令書算)을 정하였고, 곧 수태보(守太保)가 더해졌다.

1050년(문종 4)에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더해지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또한, 시중으로 도병마사를 겸하게 되자 서북 주(州)‧진(鎭)의 공역(工役)의 금지를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며, 동여진(東女眞)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053년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이를 만류하는 조서가 내려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문하시중 상주국 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上柱國致仕)라는 훈작이 내리고, 1055년 내사령(內史令)을 삼은 뒤, 다시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내렸다.
2. 구재학당과 문교활동
이러한 관력이 말해주듯이 관인으로 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치사 후에 인재양성에도 힘썼다. 당시 개경에는 사학십이도라 하여 특히 이름난 사숙(私塾)이 있었는데,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은 그 가운데서도 성황을 이루어 과거에 급제하는 생도가 많았다.

예컨대 『고려사』 열전에 “동방학교의 일어남이 최충에 비롯하여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교육에 쏟은 공이 컸다.

이러한 그의 교육에 대한 정열은 그 시대적 배경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가 활동하였던 문종초는 거란침입의 전화가 아문 뒤,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아직 국학(國學)은 유명무실이고, 향학(鄕學)도 갖추어지지 못한 때였으므로 문교(文敎)의 새바람이 점차 갈망되어졌다.

특히, 문반(文班) 현직자의 우대에 따라 그들 중심의 국가질서가 굳어지게 되었으며, 또 왕실‧외척이 세력을 부리게 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려면 실력을 길러 과거에 급제해야만 하였다.

그가 사숙을 열자 곧 문전성시의 지경에 이른 것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그리하여 송악산(松岳山)아래에 각기 공부하는 내용에 따라 방의 이름을 낙성재(樂聖齋)‧대중재(大中齋)‧성명재(誠明齋)‧경업재(敬業齋)‧조도재(造道齋)‧솔성재(率性齋)‧진덕재(進德齋)‧대화재(大和齋)‧대빙재(待聘齋) 등으로 지어 구재학당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사립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질서와 법도를 갖춘 교육사업을 전개해나가, 당시에 이곳의 학생은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 또는 최충도(崔冲徒)라고 불리고, 뒤에는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라 칭하여졌다.
3. 구재의 교육내용과 교육방침
구재(九齋)에서는 구경(九經: 周易‧尙書‧毛詩‧儀禮‧周禮‧禮記‧春秋左氏傳‧春秋公羊傳‧春秋穀梁傳)‧삼사(三史: 史記‧漢書‧後漢書)를 중심으로 가르치며, 시부(詩賦)와 사장(詞章), 즉 문학을 공부시켰지만 그저 과거준비교육에 그치지 아니하고 조직적이며 함축성 있는 인격도야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유교교육의 일방적인 요청에 따라 문장공부도 많이 시켰는데, 매년 여름철에 베푸는 하과(夏課)의 광경에서도 그가 힘쓴 교육방침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즉, 여름에는 피서를 겸하여 개경 탄현(炭峴)밖에 있는 귀법사(歸法寺) 등의 산사(山寺)‧승방을 빌려 과거에 합격한 제자 중에서 아직 관리로 들어앉지 않은 우수한 선비를 선정하여 함께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간혹 저명한 학자나 대관들이 들르면, 여러 생도들과 더불어 촛불에다 금을 긋고 짧은 시간 내에 시를 지어 읊는 각촉부시회(刻燭賦詩會)를 개최하였다.

이때 성적을 발표하여 차례로 불러앉히고 소작(小酌)을 베푸는데 진퇴의 절도와 장유(長幼)의 서열이 분명하여 종일토록 서로 수창(酬唱)하는 것이 자못 볼만하므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4. 교육사업의 반향
이 때문에 최종의 교육사업은 곧 큰 반향을 일으켜 과거를 볼 사람은 저마다 먼저 그의 도중(徒中)에 속하기를 원하였으며, 또 이 도(徒)를 모방하여 개경에만도 11개소, 합하여 12도의 사학이 다투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이들 도의 설립자는 모두가 당대에 학식과 명망이 있고 벼슬과 지체가 높았으며, 대체로 과거시험관을 지내고 유학에 힘을 쓴 선비들이었다. 따라서, 사학은 관학을 압도하여 널리 오래도록 번창해나갔다. 그 중에도 최종의 도가 제일 먼저 이루어지고 가장 권위가 있었으며 성황을 이룬 것은 말할 것도 없으니 그는 한국사립학교의 원조가 되었으며, 해동공자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그뒤 그의 사업은 자손에게 계승되어 자손들이 문행(文行)으로 출세하였을 뿐 아니라, 후진교육에 힘써 문헌공도는 연면히 학계의 중심체가 되었다.
5. 문적(文積)
최충의 문장은 시구 몇 절과 약간의 금석문자가 남아 내려올 뿐인데, 이것은 그뒤 무인의 난으로 말미암아 문신이 많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불태워질 때 함께 없어진 탓이라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시구 몇 절과 금석문으로서 원주 거돈사(居頓寺)의 원공국사승묘지탑비문(圓空國師勝妙之塔碑文)과 직산 홍경사(弘慶寺)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을 뿐이다. 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문헌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補閑集
高麗時代의 儒學發達과 私學十二徒(朴性鳳, 史叢 2, 1957)

[집필자]

박성봉(朴性鳳)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