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유(璨幽)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CC2CC720FFFFB0869X0 |
자(字) | 도광(道光) |
시호(諡號) | 원종대사(元宗大師) |
생년 | 869(경문왕 9) |
졸년 | 958(광종 9) |
시대 | 고려전기 |
활동분야 | 종교 > 불교인 |
부 | 김용(金容) |
출신지 | 계림(鷄林) 하남(河南) |
[상세내용]
찬유(璨幽)
869년(경문왕 9)∼958년(광종 9). 신라말 고려초의 선승(禪僧). 성은 김씨(金氏). 자는 도광(道光). 계림(鷄林) 하남(河南) 출신. 부친은 김용(金容)이다.
13세 때 상주 삼랑사(三朗寺)의 융제(融諦)를 찾아갔으나 융제는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고 혜목산(慧目山) 심희(審希)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890년(진성여왕 4)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광주 송계선원(松溪禪院)에서 심희의 권유에 따라 892년에 상선(商船)을 타고 입당(入唐)하여, 서주(舒州) 투자산(投子山)의 대동(大同)에게 선을 배우고 곧 도를 깨달았다.
그뒤 중국의 여러 사찰들을 유람하다가 921년(경명왕 5) 귀국하여 심희를 찾아가자, 심희는 삼창사에 머물 것을 명하였다.
3년 동안 삼창사에 머물다가 고려 태조의 청에 따라 경주 사천왕사(四天王寺)에 머물렀으나, 곧 혜목산을 좋아하여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대선림(大禪林)을 이룩하였다.
혜종과 정종은 가사(袈裟)를 내렸고, 광종은 그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증진대사(證眞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광종은 또 개경 사나원(舍那院)에 머무르게 한 뒤 3일 만에 중광전(重光殿)에서 설법하게 하고 국사(國師)로 삼았으며, 은병‧은향로‧수정염주‧법의 등을 내렸다.
뒤에 은퇴하여 혜목산에서 입적하였다. 혜목산 고달사(高達寺)에 세워졌던 그의 비는 현재 경복궁에 보존되어 있다. 제자로는 흔홍(昕弘)‧동광(同光)‧행근(幸近)‧전인(傳印) 등 500여인이 있었다. 시호는 원종대사(元宗大師), 탑호(塔號)는 혜진(慧眞)이다.
13세 때 상주 삼랑사(三朗寺)의 융제(融諦)를 찾아갔으나 융제는 그가 법기(法器)임을 알고 혜목산(慧目山) 심희(審希)를 스승으로 모시게 하였다.
890년(진성여왕 4)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광주 송계선원(松溪禪院)에서 심희의 권유에 따라 892년에 상선(商船)을 타고 입당(入唐)하여, 서주(舒州) 투자산(投子山)의 대동(大同)에게 선을 배우고 곧 도를 깨달았다.
그뒤 중국의 여러 사찰들을 유람하다가 921년(경명왕 5) 귀국하여 심희를 찾아가자, 심희는 삼창사에 머물 것을 명하였다.
3년 동안 삼창사에 머물다가 고려 태조의 청에 따라 경주 사천왕사(四天王寺)에 머물렀으나, 곧 혜목산을 좋아하여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대선림(大禪林)을 이룩하였다.
혜종과 정종은 가사(袈裟)를 내렸고, 광종은 그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증진대사(證眞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광종은 또 개경 사나원(舍那院)에 머무르게 한 뒤 3일 만에 중광전(重光殿)에서 설법하게 하고 국사(國師)로 삼았으며, 은병‧은향로‧수정염주‧법의 등을 내렸다.
뒤에 은퇴하여 혜목산에서 입적하였다. 혜목산 고달사(高達寺)에 세워졌던 그의 비는 현재 경복궁에 보존되어 있다. 제자로는 흔홍(昕弘)‧동광(同光)‧행근(幸近)‧전인(傳印) 등 500여인이 있었다. 시호는 원종대사(元宗大師), 탑호(塔號)는 혜진(慧眞)이다.
[참고문헌]
朝鮮金石總覽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집필자]
김위석(金渭錫)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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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