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실(逼實)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2D54DC2E4FFFFD0684X0 |
생년 | ?(미상) |
졸년 | 684(신문왕 4) |
시대 | 통일신라 |
활동분야 | 군인 > 장수 |
부 | 취복(聚福) |
출신지 | 경주 사량부(沙梁部) |
[상세내용]
핍실(逼實)
미상∼684년(신문왕 4). 신라 신문왕 때의 장수. 성씨는 미상.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 나마(奈麻) 취복(聚福)의 셋째아들이다.
핍실의 두 형인 부과(夫果)와 취도(聚徒)는 앞서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 그 왕족인 안승(安勝)과 고구려 유민들의 일부를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益山)로 옮겨 거주시켰는데, 684년에 안승의 족자(族子) 대문(大文, 혹은 悉伏)과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문왕은 군사를 일으켜 핍실을 귀당제감(貴幢弟監)으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는 떠날 때에 아내에게 “우리 두 형이 이미 국사(國事)에 그 이름이 썩지 않고 전한다. 내가 비록 불초하지만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히 살 것인가. 오늘 그대와 살아서 헤어지지만 끝내는 죽어 이별하게 될 것이니 잘 살면서 슬퍼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도 죽기를 각오하고 출전하였다. 그는 적진을 대하자 홀로 나가 분전하여 고구려군 수십인을 죽이고는 전사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신문왕은 이들 형제의 용맹에 탄복하여 이들에게 모두 사찬(沙飡)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핍실의 두 형인 부과(夫果)와 취도(聚徒)는 앞서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 그 왕족인 안승(安勝)과 고구려 유민들의 일부를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益山)로 옮겨 거주시켰는데, 684년에 안승의 족자(族子) 대문(大文, 혹은 悉伏)과 고구려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문왕은 군사를 일으켜 핍실을 귀당제감(貴幢弟監)으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는 떠날 때에 아내에게 “우리 두 형이 이미 국사(國事)에 그 이름이 썩지 않고 전한다. 내가 비록 불초하지만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히 살 것인가. 오늘 그대와 살아서 헤어지지만 끝내는 죽어 이별하게 될 것이니 잘 살면서 슬퍼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도 죽기를 각오하고 출전하였다. 그는 적진을 대하자 홀로 나가 분전하여 고구려군 수십인을 죽이고는 전사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신문왕은 이들 형제의 용맹에 탄복하여 이들에게 모두 사찬(沙飡)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집필자]
신동하(申東河)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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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