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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명왕(景明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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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박승영(朴昇英)
시호(諡號)경명(景明)
생년?(미상)
졸년924(신라: 경명왕 8, 경애왕 1/발해: 대인선 19/후백제: 견훤 33/태조 천수 7)
시대통일신라
활동분야왕실 > 왕
의성왕후(義成王后)
조부예겸(乂謙)
조부흥렴대왕(興廉大王)
조부문원(文元)

[상세내용]

경명왕(景明王)
미상∼924년. 신라 제54대왕. 재위 917∼924년. 성은 박씨, 이름은 승영(昇英).

부친은 신덕왕, 모친은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資成‧懿成‧孝資王后),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謙, 또는 銳謙)이다.

그러나 일설에 예겸신덕왕의 의부(義父)이고,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角干) 문원(文元)이라고 한다.

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왕실은 왕경(王京)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弓裔)견훤(甄萱) 등 지방세력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하여 왕건(王建)을 추대하였고, 궁예는 피살되었다.

그뒤 왕건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안동이나 합천지역에서 이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하였으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또, 경명왕 때에는 여러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설화기사의 이면을 생각해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위 7년 만에 죽으니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이곳에서 화장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高麗史節要
新羅三代考(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1954)

[이미지]

[집필자]

김두진(金杜珍)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