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강수(强首)

[요약정보]

UCIG002+AKS-KHF_12AC15C218FFFFU9999X1
이명(異名)우두(牛頭)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통일신라
활동분야학자 > 유생
석체(昔諦)
출신지중원소경(中原小京) 사량(沙梁)

[상세내용]

강수(强首)
생졸년 미상. 신라통일기의 유학자‧문장가. 초명은 우두(牛頭).
1. 가계와 성향
지금의 충주인 중원소경(中原小京) 사량(沙梁) 출신. 육두품(六頭品)으로 보이는 내마(奈麻) 석체(昔諦)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꿈에 머리에 뿔이 돋친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그가 태어나자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었다.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현자(賢者)를 찾아가 물어보니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고 의리를 중히 여겼다. 아버지가 그의 뜻을 알아보려고 “불도를 배우겠는가, 유도를 배우겠는가?” 하고 물으니, 강수는 “제가 듣기로는 불도는 세외교(世外敎)라고 합니다. 저는 속세의 사람이온데 어찌 불도를 배우겠읍니까. 유자의 도를 배우고자 합니다.”고 하였다.

뒤에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하여 학문이 뛰어나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 되었으며, 벼슬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지냈다.
2. 재능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자 당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국서(國書)에 알기 어려운 대목이 있어, 임금이 그에게 물으니 해석과 설명에 막히는 곳이 없었다. 왕이 감탄하여 그 성명을 물으니 “신은 본래 임나가라(任那加良: 大加耶, 지금의 高靈일대)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왕이 그대의 두골(頭骨)을 보니 가히 ‘강수선생’이라 할만하다고 하였다.

또, 당나라에 보내는 훌륭한 답서를 지으매, 임금은 더욱 기특히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하였다.

그뒤 당나라고구려백제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하게 되어 당나라에 원군을 청하는 글을 짓기도 했다.

그 글 가운데 당시 당나라에 갇혀 있는 김인문을 석방해줄 것을 청한 「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당나라 고종을 감동시켜 곧 김인문을 풀어 위로하여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671년(문무왕 11)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薛仁貴)에게 보내는 글도 지었다.
3. 성품
재물에 뜻을 두지 않아 가난하게 지내자 태종무열왕은 유사(有司)에 명하여 해마다 신성(新城)의 창고에 있는 조 1백석을 하사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문무왕이 논공행상을 할 때 그는 외교문서로써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하여 사찬(沙飡)의 관등과 세조 2백석을 증봉(增俸)받았다.

그가 죽자 왕은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집안의 사람들이 사사로이 가지지 않고 모두 불사(佛事)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생활이 곤란하여 향리로 돌아가려고 하자, 대신이 듣고 왕에게 청하여 조 1백석을 주게 하였으나 받지 않고 향리로 돌아가버렸다.
4. 학풍
그가 당시에 유행하던 불교를 세외교라 하여 버리고, 사회적으로 그 힘이 미약한 유학에 뜻을 둔 것은 개인의 착상이라기보다는 진골중심의 골품제사회에서 육두품 이하의 귀족으로 편입된 그의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커간 것이며, 또 크게는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가야의 귀족들을 사민정책(徙民政策)에 의하여 강제로 이주시킨 중원경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영향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가 공부한 학과목은 『효경(孝經)』『곡례(曲禮)』『이아(爾雅)』『문선(文選)』으로, 주로 유교적인 실천도덕과 아울러 문자와 문학에 관한 것에 비중을 두었다. 이리하여 유학자로서보다 문장가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5. 윤리관
청년시절에는 자기보다 신분이 천한 부곡(釜谷)의 대장장이의 딸과 정을 통하고 있었다.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 부모가 “너는 지금 명성이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자를 짝으로 삼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새로 읍 중의 인물로 아름답고 행실이 좋은 여자에게 장가들어라.”고 하였지만,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아니지만, 도를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여 거절하였다.

이렇게 신분이 낮은 부인을 택한 것은 새로운 윤리관의 제시이며, 신라의 전통적인 윤리에 대한 비판적 태도이다. 또, 나아가 골품제에 입각한 신라의 신분제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띤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그는 신라사회의 육두품 이하의 신분으로 유학‧문장학을 가지고 진출한 지식층이며, 또 신흥의 유교관료적 성격을 가졌던 사람으로 현존하는 기록상 최초의 본격적인 유교적 문인으로 사회사적‧사상사적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强首와 그의 思想(李基白,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1978)
新羅骨品體制下의 儒敎的 政治理念(李基白,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1978)

[집필자]

최병헌(崔柄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2011-03-30삼국사기 강수 열전에 초명이 우두(牛頭)로 나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