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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규(楊成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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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발해
활동분야외교 > 외교가

[상세내용]

양성규(楊成規)
생졸년 미상. 발해시대의 외교가.

일본 기록에 의하면 발해 12대왕 대건황(大虔晃)과 13대왕 대현석(大玄錫)시기에 벼슬을 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던 871년경에는 관직이 정당성좌윤(政堂省左允)이었고, 질(秩)이 정4품, 위군대장군 상진장군 사자금어대(慰軍大將軍上鎭將軍賜紫金魚袋)이었으나 그뒤의 행적을 알 수 없어 최종 관작은 알 수 없다.

대현석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871년에 105인의 일행을 이끌고 발해를 출발하여 12월 중순 일본 가하국(加賀國)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일본 조정에서 파견된 신하들의 접대를 받다가 872년 5월에 이르러 일행중 20명만 입경(入京)하여 홍려관(鴻臚館)에 머물렀다.

마침 이때 일본내에 역병이 돌았는데 민간에 이것이 발해 사신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고, 음양료(陰陽寮)도 발해 사신이 온 것은 불길한 징조라는 점괘를 말하였다.

이리하여 이들은 조알(朝謁)을 허락받지 못하고, 일본 신하를 통하여 가지고 간 국서(國書), 중대성(中臺省)의 첩(牒) 및 선물만 보냈다. 이에 일본 왕은 양성규에게 종3위(從三位)의 위계(位階)를 내리고 나머지 일행에게도 차등 있게 위계를 주었다.

한편, 양성규일행은 진화(珍貨)를 가지고 가서 일본의 허락을 받아 사무역(私貿易)을 행하기도 하였는데, 첫쨋날은 일본 내장료(內藏寮)와 관청간의 무역을 행하고, 둘쨋날은 경사인(京師人)과 교역을 하고, 셋쨋날은 여러 시인(市人)들과 교역하였다.

또, 양성규가 문장에 뛰어났기 때문에 일본 왕은 문인인 교세이(巨勢文雄)후지하라(藤原佐世)미야코(都良香) 등으로 하여금 접대하도록 하여 문학적 교유를 하도록 하였다.

5월말에 일본 왕이 발해 왕에게 보내는 답서와 태정관(太政官)이 발해 중대성에 보내는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참고문헌]

三代實錄
類聚國史
都氏文集
渤海國志長篇(金毓黻, 華文書局, 1934)

[집필자]

송기호(宋基豪)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