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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예(大門藝)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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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발해
활동분야왕실 > 왕족
대조영(大祚榮)

[상세내용]

대문예(大門藝)
생졸년 미상. 발해의 왕족. 시조 고왕(高王: 大祚榮)의 둘째아들이며 무왕 대무예(大武藝)의 친아우이다.

당나라가 중종(中宗)초기 장행읍(張行岌)을 보내어 대조영을 초유하였을 때, 그를 따라 당나라에 가 숙위(宿衛)로서 머물고 있다가 당나라 현종(玄宗)의 개원(開元)초에 돌아왔으므로 당나라의 정세에 밝았다.

726년(인안 8) 당시 발해와 겨루고 있던 흑룡강 하류의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대하여, 당나라가 흑수주를 만들고 장사(長史)를 두어 지배력을 가지고자 하였다. 이에 무왕은 흑수말갈이 발해 영토를 통과하여 당나라와 통하다가 지금 와서 알리지 않고 당나라와 통한다는 것은, 반드시 발해를 앞뒤에서 협공할 속셈이라고 생각하고 대문예임아(任雅)에게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대문예는 지금 흑수말갈을 치는 것은 발해의 수 배가 되는 무력을 가진 당나라의 감정을 도발하여 마치 전성시대에 30만 대군으로 당나라와 싸웠다가 망한 고구려와 같은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렸으나, 무왕은 이를 듣지 않고 진군을 강행시켰다.

그가 흑수말갈과의 경계지역에서 다시 무왕에게 글을 올려 중단할 것을 말하자, 무왕은 크게 노하여 대일하(大壹夏)와 교체하고 그를 불러들여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대문예는 두려워서 당나라로 망명하였다. 당나라로부터 좌요위장군(左驍衛將軍)을 받았다. 무왕마문궤(馬文軌) 등을 당나라에 보내어 그의 죄상을 말하고 죽일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나라현종은 그를 안서(安西: 지금의 新彊省)에 머무르도록 하고, 발해이도수(李道邃) 등을 보내어 대문예가 궁하여 찾아왔으니 의리상 죽일 수 없어 영남에 유배하였다고 알렸다.

그러나 대문예에 대한 당나라의 후대가 알려져 무왕은 다시 이진언(李盡彦)을 보내어 대국으로서의 거짓을 꾸짖으며, 대문예를 죽일 것을 거듭 요구하였다.

이에 크게 노한 현종이도수가 그 관속들에게 비밀을 지키도록 감독 못한 죄를 물어서 조주자사(曹州刺史)로 좌천하는 한편, 발해에는 최심읍(崔尋挹)을 보내어 서신으로 형제간의 우의를 간곡히 타일렀다.

그러나 무왕은 732년 장수 장문휴(張文休)에게 명하여 해적을 이끌고 등주(登州: 山東省蓬萊縣)를 공격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이고, 군의 일부를 나누어 유주(幽州: 지금의 北京)로 진군하게 하여 그 부근을 불안에 몰아넣었다가 물러갔다.

당나라에서는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대문예로 하여금 유주에서 병사를 모아서 치게 하고, 그 다음해 당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신라로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다.

무왕대문예에 대한 울분은 쉽게 풀리지 않아, 몰래 자객을 모집하여 당나라에 보내서 낙양 천진교(天津橋) 남에서 대문예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대문예는 끝내 발해로 돌아가지 않고 당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참고문헌]

新唐書
渤海國志長編(金毓黻, 1934)

[집필자]

이용범(李龍範)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