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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창(高永昌)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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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1116(예종 11)
시대발해
활동분야귀화‧유민 > 유민

[상세내용]

고영창(高永昌)
미상∼1116년(예종 11). 요나라에 대항하여 발해 광복운동을 벌였던 발해 지배층 유민.

발해가 붕괴되자 동단국(東丹國)요양(遼陽)에 강제로 옮겨살게 되었고, 그뒤 요나라에서 관직도 받는 등 친거란화된 발해계 유민이었다.

그러나 요나라 말기 요나라에 반기를 들고 발해 광복운동을 벌이게 된 계기는, 금나라태조 아골타(阿骨打)가 반란을 일으켜 곳곳에서 거란군을 크게 깨뜨리고 요동으로 남하하는 기세를 보이자, 요나라가 1115년(예종 10) 공봉관(供奉官)이었던 그에게 발해무용마군(渤海武勇馬軍) 2,000을 모집하게 하여 요양부 부근의 백초곡(白草谷)을 지키게 한 데서부터였다.

그는 당시 발해유민들에게 혹독하기로 이름난 동경유수(東京留守: 遼陽府留守) 소보선(蕭保先)에 대해 반감을 가진 발해유민을 선동하여 1116년 정월에 병사 8,000으로 요양부를 점령하고, 국호를 ‘대발해국(大渤海國: 일명 大元)’이라 하는 등 기세가 당당하였다.

이와같이, 국가의 면모를 갖춘 뒤 친거란화된 반대파를 물리치고 10여일 만에 요동부의 50여개주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귀덕주(貴德州: 지금의 鐵嶺市 東南)요나라 수장(守將) 야율여도(耶律余賭)조차 광주(廣州: 지금의 瀋陽 西南 彰驛站)에서 이 거사에 가담하게 할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심주(瀋州: 지금의 瀋陽)를 사이에 두고 요나라 재상(宰相) 장림(張琳)소한가노(蕭韓家奴) 등이 요동에서 모병한 병사 2만을 상대로 공방전을 되풀이하면서부터는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금나라와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황제의 칭호를 고집하며 금나라에 양보하지 않자, 교섭이 결렬되고 오히려 요나라금나라의 양면공격을 당하는 사태를 자초하게 되었다.

금나라알로(斡魯)가 이끄는 여진군에 의하여 5월말 근거지인 요양부가 넘어가고, 다시 남쪽 십리 지점인 수산(首山)에서 크게 타격을 받자 기병 5,000을 이끌고 장송도(長松島)로 들어갔으나, 뒤따라 밀어닥친 금나라 군사에게 잡혀 참살되고 발해 광복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운동에 실패한 발해유민들의 일부는 고려로 망명하였다. 이 사건은 거사 후 5개월의 짧은 발해 광복운동이었으나, 1029년(현종 20) 대연림(大延琳)흥료국(興遼國)과 1115년 2월부터 7월까지 고욕(古欲)에 의한 광복운동과 함께 한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요나라 내부의 주민구성이나 역사계승의식 속에 발해적 요소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속된 발해 광복운동의 실패는 발해지역의 거란화를 고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遼史
高麗와 渤海(李龍範, 한국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74)

[집필자]

한규철(韓圭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