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검색 표제어 전체
검색
고모한(高模翰)

[요약정보]

UCIG002+AKS-KHF_13ACE0BAA8D55CD0959X0
이명(異名)고송(高松)
생년?(미상)
졸년959(광종 광덕 10)
시대발해
활동분야귀화‧유민 > 유민

[상세내용]

고모한(高模翰)
미상∼959년. 요나라에서 활약한 발해의 유민. ‘고송(高松)’이라고도 하며 군사전략에 뛰어났다.

발해멸망기에 발해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활약상은 주로 발해멸망 후의 요나라 조정 밑에서 빛을 보았다. 따라서, 그는 거란에 충성하였던 발해유민의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발해왕실이 멸망할 즈음에 고려로 망명하였다가, 고려왕의 첩을 아내로 삼는 죄를 짓고 다시 요나라로 도망하였다. 요나라에 돌아와서도 술을 먹고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갇혔으나,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요나라 태조에 의하여 풀려났다.

그의 재능은 936년 후당(後唐)의 공격에 직면하여 구원요청을 해온 태원(太原)석경당(石敬瑭)을 도우면서부터 확인되었다. 후당은 936년 7월 장경달(張敬達)양광원(楊光遠)에게 군사 50만을 거느리고 태원을 공격하게 하자, 성주인 석경당요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요나라태종고모한을 보내어 후당군의 공격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938년 요나라에 협조적이었던 석경당후진(後晉)이 친선동맹을 배반하고 요나라를 공격해오자, 다시 고모한통군부사(統軍副使)로 발탁되어 후진을 격퇴하였다. 그는 시중(侍中)태부(太傅)의 벼슬을 받았다.

또, 한 차례 후진위부절도사(魏府節度使) 두중위(杜重威)가 30만병력을 이끌고 와서 요나라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때에도 고모한의 계략으로 후진군대를 패퇴, 항복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전공으로 그는 특진검교태사(特進檢校太師)의 벼슬을 받고, 철군(悊郡)개국공(開國公)이 되었으며, 변주(汴州)순검사(巡檢使)가 되어서는 범수(氾水)의 여러 산적들을 평정하기도 하였다.

948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벼슬을 받았고, 목종초 관직이 중대성(中臺省)우상(右相)에까지 오르고, 959년 정월 좌상(左相)으로 옮겼으며, 그해에 죽었다.

[참고문헌]

遼史
渤海國志長編(金毓黻, 華文書局, 1934)

[집필자]

한규철(韓圭哲)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