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덕(明德)
[상세내용]
명덕(明德)
생졸년 미상.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때의 대표적 고승인 보덕화상(普德和尙)의 11제자 중의 하나이다.
보덕이 함흥의 반룡산(盤龍山) 연복사(延福寺)에서 지낼 무렵, 연개소문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도교가 날로 성해지는 것을 걱정하여 보장왕에게 여러 차례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국운이 위태롭게 될 것을 예견하고 고구려를 떠났다. 이때 명덕이 완산주(完山州)에 있는 고달산(高達山)을 추천하여 이곳으로 옮겨가 경복사(景福寺)를 짓고 살았는데, 보덕이 거처하고 있던 방장(方丈)을 하룻밤 사이에 옮겼다는 비래방장(飛來方丈)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규보의 기(記)에는 명덕이, ‘이 산이 비록 뛰어나긴 하나 샘물이 말라 있다. 내가 만약 스승께서 옮겨 오실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반룡산의 샘도 옮겨왔을 텐데.’ 하였다고 한다.
이규보는 이주한 시기를 백제가 멸망한 660년 이후인 667년(보장왕 26) 3월 3일이라고 적었는데, 650년(보장왕 9) 6월에 옮겼다는 기록도 있다.
무상(無上), 적멸(寂滅), 의융(義融), 지수(智藪), 일승(一乘), 수정(水淨), 사대(四大), 개원(開原), 개심(開心) 등 보덕의 제자들이 각각 절을 창건하였는데, 명덕은 연구사(燕口寺)를 창건하였다.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때의 대표적 고승인 보덕화상(普德和尙)의 11제자 중의 하나이다.
보덕이 함흥의 반룡산(盤龍山) 연복사(延福寺)에서 지낼 무렵, 연개소문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도교가 날로 성해지는 것을 걱정하여 보장왕에게 여러 차례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국운이 위태롭게 될 것을 예견하고 고구려를 떠났다. 이때 명덕이 완산주(完山州)에 있는 고달산(高達山)을 추천하여 이곳으로 옮겨가 경복사(景福寺)를 짓고 살았는데, 보덕이 거처하고 있던 방장(方丈)을 하룻밤 사이에 옮겼다는 비래방장(飛來方丈)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규보의 기(記)에는 명덕이, ‘이 산이 비록 뛰어나긴 하나 샘물이 말라 있다. 내가 만약 스승께서 옮겨 오실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반룡산의 샘도 옮겨왔을 텐데.’ 하였다고 한다.
이규보는 이주한 시기를 백제가 멸망한 660년 이후인 667년(보장왕 26) 3월 3일이라고 적었는데, 650년(보장왕 9) 6월에 옮겼다는 기록도 있다.
무상(無上), 적멸(寂滅), 의융(義融), 지수(智藪), 일승(一乘), 수정(水淨), 사대(四大), 개원(開原), 개심(開心) 등 보덕의 제자들이 각각 절을 창건하였는데, 명덕은 연구사(燕口寺)를 창건하였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新增東國輿地勝覽
[집필자]
고윤희
수정일 | 수정내역 |
---|---|
2008-12-31 | 2008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