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도(李師道)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C0ACB3C4D0819X0 |
생년 | ?(미상) |
졸년 | 819(신라: 헌덕왕 11/발해: 선왕 건흥 2) |
시대 | 고구려 |
활동분야 | 관료 |
부 | 이납(李納) |
조부 | 이정기(李正己) |
[상세내용]
이사도(李師道)
미상∼819년. 고구려 유민출신의 당나라 절도사(節度使). 고려 이씨, 즉 고구려 유민으로서 평로절도사 검교상서 좌복야(平盧節度使檢校尙書左僕射)를 역임하는 등 당나라 헌종 때에 크게 활약하였다.
할아버지는 평로절도사 수사공 요양군왕(守司空饒陽君王) 이정기(李正己), 부친은 평로절도사 검교사공(檢校司空) 이납(李納)이며, 평로절도사 검교사도 겸 시중(檢校司徒兼侍中)을 역임한 이사고(李師古)의 이복동생이다.
이사고가 죽은 뒤 그 후계자로서 이사도를 천거하여 조정에 청하였으나 제서(制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재상 황상(黃常)이 그 권세를 꺾으려 한 것이었다.
이때 헌종은 바야흐로 유벽(劉闢)을 주살하여 동쪽을 토벌할 겨를이 없어 이사도에게 이 지역에 대한 책임을 맡게 하고 그해에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를 가하고 부대사(副大使)로 삼았다.
헌종이 채(蔡)땅을 토벌할 때 이사도는 무리 2천명을 뽑아 수춘(壽春)땅에 이르게 하였는데, 겉으로는 왕의 군대를 도우려 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는 채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헌종에 의하여 채가 평정되어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郞) 장숙(張宿)을 보내어 땅을 나누고 질자(質子)를 보내게 하니, 이사도는 3주를 바치고 아들 홍방(弘方)을 보내어 입시하게 하였다.
그런데 휘하 여러 장수들의 만류에 따라 이사도는 군이 불협하여서 따르지 못한다고 보고하니, 헌종이 노하여 그 관직을 삭탈하고 여러 군대에게 나아가 치도록 조서를 내렸다.
그리하여 헌종은 819년(헌덕왕 11) 7월에 운주(鄆州: 지금의 山東省濟寧道)절도사 이사도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으며, 신라는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金雄元)이 갑병(甲兵) 3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한편, 이사도는 자신의 군대가 대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대장 유오(劉悟)를 보내어 치게 하였으나 오히려 유오의 군대가 반란하였음을 듣고, 아들 홍방과 함께 숨어 있다가 적군에게 사로잡혀 일생을 마쳤다.
할아버지는 평로절도사 수사공 요양군왕(守司空饒陽君王) 이정기(李正己), 부친은 평로절도사 검교사공(檢校司空) 이납(李納)이며, 평로절도사 검교사도 겸 시중(檢校司徒兼侍中)을 역임한 이사고(李師古)의 이복동생이다.
이사고가 죽은 뒤 그 후계자로서 이사도를 천거하여 조정에 청하였으나 제서(制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재상 황상(黃常)이 그 권세를 꺾으려 한 것이었다.
이때 헌종은 바야흐로 유벽(劉闢)을 주살하여 동쪽을 토벌할 겨를이 없어 이사도에게 이 지역에 대한 책임을 맡게 하고 그해에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를 가하고 부대사(副大使)로 삼았다.
헌종이 채(蔡)땅을 토벌할 때 이사도는 무리 2천명을 뽑아 수춘(壽春)땅에 이르게 하였는데, 겉으로는 왕의 군대를 도우려 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는 채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헌종에 의하여 채가 평정되어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郞) 장숙(張宿)을 보내어 땅을 나누고 질자(質子)를 보내게 하니, 이사도는 3주를 바치고 아들 홍방(弘方)을 보내어 입시하게 하였다.
그런데 휘하 여러 장수들의 만류에 따라 이사도는 군이 불협하여서 따르지 못한다고 보고하니, 헌종이 노하여 그 관직을 삭탈하고 여러 군대에게 나아가 치도록 조서를 내렸다.
그리하여 헌종은 819년(헌덕왕 11) 7월에 운주(鄆州: 지금의 山東省濟寧道)절도사 이사도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으며, 신라는 순천군장군(順天軍將軍) 김웅원(金雄元)이 갑병(甲兵) 3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한편, 이사도는 자신의 군대가 대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대장 유오(劉悟)를 보내어 치게 하였으나 오히려 유오의 군대가 반란하였음을 듣고, 아들 홍방과 함께 숨어 있다가 적군에게 사로잡혀 일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新唐書
唐代藩鎭의 한 硏究―高句麗遺民 李正己一家를 中心으로―(金文經, 省谷論叢 6, 1975;唐 高句麗遺民과 新羅僑民, 日新社, 1986)
唐代藩鎭의 한 硏究―高句麗遺民 李正己一家를 中心으로―(金文經, 省谷論叢 6, 1975;唐 高句麗遺民과 新羅僑民, 日新社, 1986)
[집필자]
김영심(金英心)
명 : "사도(師道)"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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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