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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식(姜以式)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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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고구려
본관진주(晉州)
활동분야무신 > 명장
묘소심양현 원수림(潘陽縣元帥林: 현 滿洲 奉吉縣 元林驛前)

[상세내용]

강이식(姜以式)
생졸년 미상. 고구려의 명장.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시조이다.

597년(영양왕 8) 수(隋)나라중국을 통일한 후 국력을 과시하면서 고구려에 모욕적인 국서를 보내오자 이에 대응, 무력으로 맞설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성사시켰다. 이 결과 고구려수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정병 5만을 이끌고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는 이듬해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로 나아가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과 접전하다가 임유관(臨渝關)으로 거짓 후퇴하였다. 이에 수나라문제(文帝)는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양(楊諒)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삼아 임유관으로 보내고, 주나후(周羅睺)수군총관(水軍總管)으로 삼아 바다로 출행시키면서 평양으로 출전한다고 성언(聲言)하였다.

그러나 이는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의 대병에게 군량을 대주려는 속임수 전략이었다. 이에 병마원수인 그는 이를 간파하고 수군(水軍)으로 바다에 나아가 나후의 군량선을 격파하고, 군중(軍中)에 벽루(壁壘)를 지키라고 명하여 출행하지 않으니 수나라 군사들은 양식이 떨어지고, 마침 6월 장마철이라 기아와 질병으로 인하여 수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때를 기회로 총공격을 가하여 수나라 군사들을 거의 섬멸하고, 군자(軍資)‧기기(器機) 등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으니, 이것이 고구려수나라 사이에 일어난 제1차전쟁이었다.

그의 묘는 옛 고구려 땅인 심양현 원수림(潘陽縣元帥林: 현 滿洲 奉吉縣 元林驛前)에 있다. 위의 내용은 『조선상고사』에 실려 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대동운해(大東韻海)』에 실린 사실을 신채호(申采浩)가 인용한 것이다.

[참고문헌]

增補文獻備考
朝鮮上古史

[집필자]

강주진(姜周鎭)
대표명강이식(姜以式)
성명강이식(姜以式)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