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왕(大武神王)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4B300BB34C2E0B0004X0 |
이명(異名) | 무휼(無恤) |
생년 | 4(유리왕 23) |
졸년 | 44(민중왕 1) |
시대 | 고구려 |
활동분야 | 왕실 > 왕 |
외조부 | 송양(松讓) |
[상세내용]
대무신왕(大武神王)
4년(유리왕 23)∼44년(민중왕 1). 고구려의 제3대왕. 일명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재위 18∼44년. 이름은 무휼(無恤)이다. 모친은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딸이다.
14년(유리왕 33) 11세 때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5세에 즉위하였는데, 27년 동안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성장에 큰 공헌을 하였다. 동부여왕(東扶餘王) 대소(帶素)와 싸워 그를 죽이고, 그 땅을 병합하였으며, 26년 압록강 상류 방면의 개마국(蓋馬國)을 정복하고, 이어 이웃의 구다왕국(句茶王國)의 항복을 받았다.
28년 한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침략해왔으나 송옥구(松屋句)와 을두지(乙豆智)의 지략으로 물리쳤고, 32년 호동왕자(好童王子)의 활약으로 낙랑을 공격하는 등 성장된 국력을 과시하면서 국토를 크게 넓혔다.
그리하여 이해에는 후한(後漢) 광무제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국제적으로도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을두지‧송옥구 등 많은 인물을 등용하고, 처음으로 좌‧우보체제(左右輔體制)를 설치, 확립시켜 이들로 하여금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 형성을 위한 첫 단계를 만들었다.
44년에 사망하였으며,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의 그의 본기(本紀)에는 「적오설화(赤烏說話)」‧「부정설화(負鼎說話)」‧「초인설화(草人說話)」‧「이어설화(鯉魚說話)」‧「호동왕자와 낙랑공주설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설화들은 고구려의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14년(유리왕 33) 11세 때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5세에 즉위하였는데, 27년 동안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성장에 큰 공헌을 하였다. 동부여왕(東扶餘王) 대소(帶素)와 싸워 그를 죽이고, 그 땅을 병합하였으며, 26년 압록강 상류 방면의 개마국(蓋馬國)을 정복하고, 이어 이웃의 구다왕국(句茶王國)의 항복을 받았다.
28년 한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침략해왔으나 송옥구(松屋句)와 을두지(乙豆智)의 지략으로 물리쳤고, 32년 호동왕자(好童王子)의 활약으로 낙랑을 공격하는 등 성장된 국력을 과시하면서 국토를 크게 넓혔다.
그리하여 이해에는 후한(後漢) 광무제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국제적으로도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을두지‧송옥구 등 많은 인물을 등용하고, 처음으로 좌‧우보체제(左右輔體制)를 설치, 확립시켜 이들로 하여금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 형성을 위한 첫 단계를 만들었다.
44년에 사망하였으며,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의 그의 본기(本紀)에는 「적오설화(赤烏說話)」‧「부정설화(負鼎說話)」‧「초인설화(草人說話)」‧「이어설화(鯉魚說話)」‧「호동왕자와 낙랑공주설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설화들은 고구려의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志
後漢書
高句麗 初期의 左‧右輔와 國相(李鍾旭,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9)
三國志
後漢書
高句麗 初期의 左‧右輔와 國相(李鍾旭,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9)
[집필자]
김용선(金龍善)
대표명 | 대무신왕(大武神王) |
명 | 무휼(無恤) |
왕명 | 대무신왕(大武神王), 대무왕(大武王), 무대(武大), 무대신왕(武大神王), 신왕(神王) |
명 : "무휼(無恤)"에 대한 용례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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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