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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왕(仇衡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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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異名)구충왕(仇衝王)
이명(異名)구해왕(仇亥王)
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가야
본관김해(金海)
활동분야왕실 > 왕

[상세내용]

구형왕(仇衡王)
생졸년 미상. 금관가야의 제10대왕.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조에 “금관국의 임금 구해(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인 장남 노종(奴宗), 중남 무덕(武德), 계남(季男)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금관가야의 멸망연대를 진흥왕 23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으나, 또한 「개황력(開皇曆)」을 인용하며 법흥왕 19년에 망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 세 아들의 이름은 세종(世宗)무도(茂刀)무득(茂得)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의 이름과 표기가 다를 뿐이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써 대접하고, 왕에게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고 하였다.

아들 김무력은 많은 무공을 세우고 각간(角干)의 벼슬에 까지 올랐다. 김유신김무력의 손자이다. 금관가야는 멸망하였으나, 그 왕족은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성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日本書紀

[집필자]

김정학(金廷鶴)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