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麻鹵)
[상세내용]
마로(麻鹵)
생졸년 미상. 백제 성왕 때의 장군.
『일본서기』에 따르면, 529년(성왕 7) 3월 성왕은 장군 군윤귀(君尹貴)‧마나갑배(麻那甲背)‧마로 등을 안라(安羅)에 파견하여 신라에 의하여 멸망한 남가라(南加羅: 금관가야로 추정) 등의 부흥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며, 이때 왜(倭)에서는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을 파견하여 임나(任那)를 재건하려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무렵 신라는 남서방의 경영에 주력하였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524년(법흥왕 11)에는 남경을 개척하였으며, 532년에는 금관가야를 복속하였다고 한다. 이는 신라가 지금의 창녕 및 김해지역을 정복하였음을 의미한다.
두 기록은 신라에 의한 금관가야 멸망과 그에 따른 백제와 왜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서로 연결된다.
한편 마로는 『일본서기』 흠명왕(欽明王) 2년 4월조에 하부(下部) 중좌평(中佐平) 마로로 나타난다. 이는 529년의 일을 다시 언급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사이에 마로는 좌평으로 관위가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529년(성왕 7) 3월 성왕은 장군 군윤귀(君尹貴)‧마나갑배(麻那甲背)‧마로 등을 안라(安羅)에 파견하여 신라에 의하여 멸망한 남가라(南加羅: 금관가야로 추정) 등의 부흥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며, 이때 왜(倭)에서는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을 파견하여 임나(任那)를 재건하려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무렵 신라는 남서방의 경영에 주력하였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524년(법흥왕 11)에는 남경을 개척하였으며, 532년에는 금관가야를 복속하였다고 한다. 이는 신라가 지금의 창녕 및 김해지역을 정복하였음을 의미한다.
두 기록은 신라에 의한 금관가야 멸망과 그에 따른 백제와 왜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서로 연결된다.
한편 마로는 『일본서기』 흠명왕(欽明王) 2년 4월조에 하부(下部) 중좌평(中佐平) 마로로 나타난다. 이는 529년의 일을 다시 언급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사이에 마로는 좌평으로 관위가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日本書紀
任那と日本(金延鶴, 小學館, 東京, 1977)
任那興亡史(末松保和, 吉川弘文館, 東京, 1956)
日本書紀
任那と日本(金延鶴, 小學館, 東京, 1977)
任那興亡史(末松保和, 吉川弘文館, 東京, 1956)
[집필자]
이근우(李根雨)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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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