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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사치(廉斯鑡)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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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진한
활동분야기타 > 기타

[상세내용]

염사치(廉斯鑡)
생졸년 미상.

삼한시대 진한의 수장(首長).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전 마한조에 인용된 『위략(魏略)』에는 우거수(右渠帥) 염사치왕망(王莽) 지황연간(地皇年間, 서기 20∼23)에 낙랑군에 귀화한 사실이 보이고 있다.

그는 낙랑의 토지가 기름지고 백성이 잘 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귀화하려고 가던 도중 호래(戶來)라고 하는 한 한인(漢人)을 만났는데, 호래는 그보다 3년 전에 재목을 채벌하기 위하여 진한지방에 왔다가 붙잡혀 노예가 된 1,500명의 한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호래를 데리고 낙랑군 함자현(含資縣)에 이르러 한인 나포사실을 보고하였던바, 군현당국에서는 그에게 포로 쇄환(刷還)의 임무를 맡기었다. 이에 그는 잠중(芩中)에서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돌아와 이 문제를 놓고 진한당국과 협상하였다.

그리하여 생존자 1천명과 이미 죽은 5백명에 대한 배상으로 진한인 1만5천명과 모한포(牟韓布) 1만5천필을 얻어 낙랑군에 돌아갔다. 그는 이 공로로 관책(冠幘)과 전택(田宅)을 받았으며, 자손대대로 부역과 조세 면제의 특권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 한조에는 서기 44년에 염사(廉斯)사람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군에 조공을 바쳐 읍군(邑君)이 되었다는 기사가 보이고 있다.

이와같은 사실은 당시 낙랑군이 삼한사회에 대하여 경제적 수탈과 병행하여 정치적인 회유책을 쓰고 있던 사실을 보여주는 실례로서 주목되고 있다.

다만 염사치는 인명이라기보다는 염사지방의 치, 즉 수장의 뜻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며, 소마시는 아마도 염사치낙랑군에 귀화한 뒤 이 지방의 수장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염사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충청남도 당진군 해미로 추정되고 있으나, 이를 낙동강하류 가야지방일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참고문헌]

三國志
後漢書
廉斯鑡說話考(丁仲煥, 大丘史學 7‧8,1973)
目支國의 位置와 그 地理(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집필자]

이기동(李基東)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