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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려(南閭)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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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미상)
졸년?(미상)
시대고조선
활동분야왕실 > 왕

[상세내용]

남려(南閭)
생졸년 미상. 위만조선 말기의 예족(濊族, 薉族)의 군장.

당시 예족사회는 압록강상류 및 동가강(佟佳江) 유역일대를 중심으로 부족연맹체단계의 정치적 성장을 이룩하였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한편으로는 동방사회의 영도세력의 위치에 있던 위만조선으로부터 상당한 간섭을 받고 있던 처지였으므로, 위만조선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서기전 128년에 휘하의 28만인과 함께 한(漢)에 투항하였다.

그래서 한나라가 이 지역에 창해군(蒼海郡, 滄海郡)을 설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편 『사기』『한서』 등의 문헌에서는 그를 ‘예군(薉君, 濊君)’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예족의 족장’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 위만조선이나 으로부터 수여된 칭호라 생각된다.

그리고 남려를 족장으로 한 예족사회의 위치에 대해서는 안정복(安鼎福)의 ‘강릉설(江陵說)’, 유득공(柳得恭)의 ‘춘천설(春川說)’, 이마니시(今西龍)의 ‘함흥(咸興) 또는 정평설(定平說)’, 이케우치(池內宏)의 ‘영흥설(永興說)’ 등 여러 설이 있다.

[참고문헌]

漢書(武帝紀)
後漢書
韓國古代國家發達史(金哲埈, 한국일보사, 1975)
玄菟郡考(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1976)
眞番郡考(今西龍, 朝鮮古史の硏究, 1937)
眞番郡の位置について(池內宏, 滿鮮史硏究 上世, 1951)

[집필자]

서영대(徐永大)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