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제(金龍濟)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AE40C6A9C81CB1868X0 |
이명(異名) | 김촌용제(金村龍濟) |
호(號) | 지촌(知村) |
생년 | 1909(융희 3) |
졸년 | 1994 |
시대 | 항일기 |
활동분야 | 문학 > 평론가 |


[상세내용]
김용제(金龍濟)
1909년(융희 3) 2월 3일∼1994년 6월 21일. 일제 강점기 문학평론가‧시인. 호는 지촌(知村)이고, 창씨한 이름은 김촌용제(金村龍濟)이다. 출신지는 충청북도 음성군(陰城郡) 생극면(笙極面)이다.
1929년 4월 일본 주오[中央]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일본의 좌익문단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6월 일본 문예동인지 『신흥시인(新興詩人)』에 시 「압록강」으로 등단하였고, 1931년 8월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NAPF)의 후신인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KOPF)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일본 좌익문단을 이끌 인재로 평가받았던 1932년 6월 13일부터 1936년 11월까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반복하다가 1937년 7월 조선으로 강제송환되었다.
강제송환된 이후 주로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친일문학 활동에 나서며 전향된 모습을 보였다. 1938년 대동아공영권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군국주의 단체인 동아연맹(東亞聯盟)의 조선지부격인 조선동아연맹과 가까이 하였다. 이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운 일문(日文)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의 편집에 참여하여 사업부장과 편집부장을 지냈다. 『동양지광』에 노래가사 「내선일체의 노래」와 시 「기원-징병의 감격 기(其)2‧3」‧「학도동원(學徒動員)」 등을 발표하면서 친일문학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렇게 학병과 징병을 선동하는 작품 「일본의 아침」‧「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다수를 아사히[朝日]신문과 매일신보에 발표하였으며, 「아세아(亞細亞)의 시」‧「폭격」‧「전차」‧「바람의 말」‧「해신(海神)」‧「정렬의 처녀도」‧「눈물 아름다워라」 등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시를 다수 투고하는 등 적극적으로 변절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전쟁문학」‧「황군위문문사부대」‧「조선문화운동의 당면 임무」 등의 산문과 해군을 찬양하는 시 낭독 등을 통해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국민문학이나 문화 등을 선전하는 데 힘썼다. 이를 통해 내선일체와 동양 신질서 건설을 위한 애국적 문학을 강조하는 한편 문장보국(文章報國)과 국민교화 실천에 노력할 것 등을 촉구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 전반에 대하여 지지하고 지원하는 입장에서 문단의 역할을 주장하며 작품 활동 외에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의 발기인과 상무이사로 활동하였고,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에서는 시부회(詩剖會) 간사장과 상무이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결전문화대강연회, 국민시낭독회, 문예의 밤, 적국항복대강연, 장행회(壯行會), 대동아문학자대회, 예술부문 관계자 연성회(練成會) 등의 대회와 각종 방문, 모임에 참여하였다. 또 전쟁전사자 유족 방문과 일본정신 체득을 위한 문예전과 연성회에도 참가하였다.
각종 외부활동으로 인해 1943년에는 아세아시집으로 제1회 국어총독문예상(國語總督文藝賞)을 받았으며, 1943년에는 경성대화숙(京城大和塾)으로부터도 표창장을 받았다.
광복 이후 왕성했던 친일문학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불기소 처리되었다.
이후 한동안 집필활동을 중단하다가 반공주의(反共主義) 작가로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1978년에는 「고백적 친일문학론」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친일 행적이 독립 운동을 위한 위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929년 4월 일본 주오[中央]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일본의 좌익문단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 6월 일본 문예동인지 『신흥시인(新興詩人)』에 시 「압록강」으로 등단하였고, 1931년 8월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NAPF)의 후신인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KOPF)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일본 좌익문단을 이끌 인재로 평가받았던 1932년 6월 13일부터 1936년 11월까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반복하다가 1937년 7월 조선으로 강제송환되었다.
강제송환된 이후 주로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친일문학 활동에 나서며 전향된 모습을 보였다. 1938년 대동아공영권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군국주의 단체인 동아연맹(東亞聯盟)의 조선지부격인 조선동아연맹과 가까이 하였다. 이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운 일문(日文)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의 편집에 참여하여 사업부장과 편집부장을 지냈다. 『동양지광』에 노래가사 「내선일체의 노래」와 시 「기원-징병의 감격 기(其)2‧3」‧「학도동원(學徒動員)」 등을 발표하면서 친일문학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렇게 학병과 징병을 선동하는 작품 「일본의 아침」‧「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다수를 아사히[朝日]신문과 매일신보에 발표하였으며, 「아세아(亞細亞)의 시」‧「폭격」‧「전차」‧「바람의 말」‧「해신(海神)」‧「정렬의 처녀도」‧「눈물 아름다워라」 등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시를 다수 투고하는 등 적극적으로 변절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전쟁문학」‧「황군위문문사부대」‧「조선문화운동의 당면 임무」 등의 산문과 해군을 찬양하는 시 낭독 등을 통해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국민문학이나 문화 등을 선전하는 데 힘썼다. 이를 통해 내선일체와 동양 신질서 건설을 위한 애국적 문학을 강조하는 한편 문장보국(文章報國)과 국민교화 실천에 노력할 것 등을 촉구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 전반에 대하여 지지하고 지원하는 입장에서 문단의 역할을 주장하며 작품 활동 외에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의 발기인과 상무이사로 활동하였고,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에서는 시부회(詩剖會) 간사장과 상무이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결전문화대강연회, 국민시낭독회, 문예의 밤, 적국항복대강연, 장행회(壯行會), 대동아문학자대회, 예술부문 관계자 연성회(練成會) 등의 대회와 각종 방문, 모임에 참여하였다. 또 전쟁전사자 유족 방문과 일본정신 체득을 위한 문예전과 연성회에도 참가하였다.
각종 외부활동으로 인해 1943년에는 아세아시집으로 제1회 국어총독문예상(國語總督文藝賞)을 받았으며, 1943년에는 경성대화숙(京城大和塾)으로부터도 표창장을 받았다.
광복 이후 왕성했던 친일문학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불기소 처리되었다.
이후 한동안 집필활동을 중단하다가 반공주의(反共主義) 작가로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1978년에는 「고백적 친일문학론」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친일 행적이 독립 운동을 위한 위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大村益夫, 愛する大陸よ-시인 김용제 연구(大和書房, 1992년)
지촌 김용제와 친일문학의 논리(권순긍, 수원대 국어국문학회, 1996)
東洋之光(1939.3) 외
朝光(1939.12) 외
國民文學(1943.9) 외
매일신보(1939.4.9) 외
경성일보(1943.2.4) 외
朝日新聞 南鮮版(1943.1.5)
중앙일보(1994.6.22)
고백적 친일문학론(김용제, 1978) 등
지촌 김용제와 친일문학의 논리(권순긍, 수원대 국어국문학회, 1996)
東洋之光(1939.3) 외
朝光(1939.12) 외
國民文學(1943.9) 외
매일신보(1939.4.9) 외
경성일보(1943.2.4) 외
朝日新聞 南鮮版(1943.1.5)
중앙일보(1994.6.22)
고백적 친일문학론(김용제, 1978) 등
[집필자]
도승현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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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