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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하(金濟河)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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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1873(고종 10)
졸년?(미상)
시대조선후기
활동분야관료

[상세내용]

김제하(金濟河)
1873년(고종 10) 9월 26일∼미상. 일제 강점기 관료. 본적은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정주면(定州面)이다.

평안북도 정주군의 유력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유교적 소양을 쌓은 인물인 동시에 상당한 자산가였다. 1907년(융희 1) 평안북도 곽산군 북면 면장, 1909년(융희 3) 평안북도 정주지방금융조합 설립위원‧곽산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1911년 6월 곽산군 군참사, 1913년 곽산군향교 직원, 1914년부터 1920년 9월까지 정주군의 군참사로 활동하였다. 1916년에는 명치신궁봉찬회 평안북도군위원‧정주군지주조합 부조합장, 1917년부터 1918년까지는 평안북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정주 지역 출신들이 많이 가담하면서 민심이 술렁이자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시국강연회에 평북 대표로 참가하는 등 독립운동을 방해한 인물로 손꼽힌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는 독립운동을 일망타진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괴롭힌 인물로서 죽여야 할 대상자 중 한 사람으로 보도되었다. 1920년 유교 계열 친일단체인 대동사문회로부터 정주군 향교 전사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4월부터 1929년까지 정주금융조합장을 지냈다. 1920년과 1924년에는 평안북도 도평의회원, 1922년부터 1925년까지와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를 역임하였다.

1928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소화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40년에 공유수면 매립으로 인해 새로 생긴 전답을 획득하는 등 경제활동을 한 기록이 있으나 사망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참고문헌]

각도의원추천의건(1921)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1927) 등
조선총독부관보(1922.6.20) 등

[집필자]

문혜경
수정일수정내역
2010-10-23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