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양(朴熙陽)
[상세내용]
박희양(朴熙陽)
1867년(고종 4) 8월 22일∼1932년 9월 8일. 일제 강점기 관료.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경민(景民)이다. 본적은 경성부(현 서울) 종로구(鍾路區) 수창동(需昌洞)이다.
조부는 박용수(朴容壽)이며 부친은 박제성(朴齊性), 생부는 박제순(朴齊恂)이다. 형은 중추원참의를 역임한 박이양(朴彛陽)이다.
1894년(고종 31) 식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고, 1895년(고종 32)에 법부 주사, 농상공부 주사를 거쳐 1905년(광무 9)에는 농상공부 참서관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융희 1)에 문관전고소 위원, 농상공부 서기관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융희 4)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찬의로 임명되었다. 재직 중이던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1916년 7월부터 시작된 조선총독부의 반도사 편찬사업에 조사주임으로서 참여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반도사 편찬사업은 충성스런 제국신민을 길러낼 것과 민심을 훈육할 것을 주 목적으로 하여 시작되었으며 이후 조선역사를 왜곡하고 내선일체의 표방을 위한 역사 편찬을 위해 확대개편된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편찬으로 이어졌다.
1915년에는 일제가 5년간 행한 조선지배정책을 미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한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부회원으로 활동하였고, 대동사문회의 평사를 역임하였다. 대동사문회는 표면적으로는 유교의 부흥을 내세웠으나 결성과정 및 총독부와의 관계, 그리고 참여한 인물의 면모 등을 살펴볼 때 친일적 성격을 띠는 단체이다.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로 임명되어 1924년까지 활동하였다.
조부는 박용수(朴容壽)이며 부친은 박제성(朴齊性), 생부는 박제순(朴齊恂)이다. 형은 중추원참의를 역임한 박이양(朴彛陽)이다.
1894년(고종 31) 식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였고, 1895년(고종 32)에 법부 주사, 농상공부 주사를 거쳐 1905년(광무 9)에는 농상공부 참서관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융희 1)에 문관전고소 위원, 농상공부 서기관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융희 4)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찬의로 임명되었다. 재직 중이던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1916년 7월부터 시작된 조선총독부의 반도사 편찬사업에 조사주임으로서 참여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반도사 편찬사업은 충성스런 제국신민을 길러낼 것과 민심을 훈육할 것을 주 목적으로 하여 시작되었으며 이후 조선역사를 왜곡하고 내선일체의 표방을 위한 역사 편찬을 위해 확대개편된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편찬으로 이어졌다.
1915년에는 일제가 5년간 행한 조선지배정책을 미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한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부회원으로 활동하였고, 대동사문회의 평사를 역임하였다. 대동사문회는 표면적으로는 유교의 부흥을 내세웠으나 결성과정 및 총독부와의 관계, 그리고 참여한 인물의 면모 등을 살펴볼 때 친일적 성격을 띠는 단체이다.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로 임명되어 1924년까지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대한제국관원이력서
매일신보(1915.8.17)
조선총독부관보 외
매일신보(1915.8.17)
조선총독부관보 외
[집필자]
문혜경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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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3 | 2010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