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용(李弼鎔)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774D544C6A9B1848X0 |
자(字) | 천뢰(天賚) |
생년 | 1848(헌종 14)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후기 |
본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문신 |

부 | 이재승(李載昇) |

[상세내용]
이필용(李弼鎔)
1848년(헌종 14)~미상. 조선 말기 문신. 자는 천뢰(天賚)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안군(慶安君) 이회(李檜)와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이경식(李敬植)이고, 조부는 이중섭(李重燮)이며, 부친은 이재승(李載昇)이다. 외조부는 조진학(趙鎭鶴)이고, 처부는 윤자직(尹滋直)이다.
1871년(고종 8) 정시에 병과 19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수찬(修撰)‧응교(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1876년(고종 13) 수찬 재임 시절 임금의 권면(勸勉)을 청하는 홍문관(弘文館)의 연명차자(聯名箚子)에 동참하였다. 1881년(고종 18) 부수찬 재임 시절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불태울 것과 시무책을 주청하는 척사소를 올린 홍시중(洪時中)과 황재현(黃載顯) 등의 상소문을 홍문관에서 문제 삼아 국문(鞠問)을 청할 때 동참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84년(고종 21) 응교 재임 시절 홍문관의 연명차자를 통해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모자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 등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1896년(건양 1) 예종과 예종의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위패가 있는 창릉(昌陵)에 불이 나 봉분이 훼손되는 일이 있었는데, 재관(齋官)이 보고를 누락하고 멋대로 잔디를 새로 입힌 사실이 드러나자 임금의 명으로 장례원경(掌禮院卿)의 직책으로 창릉을 시찰하였다.
경안군(慶安君) 이회(李檜)와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이경식(李敬植)이고, 조부는 이중섭(李重燮)이며, 부친은 이재승(李載昇)이다. 외조부는 조진학(趙鎭鶴)이고, 처부는 윤자직(尹滋直)이다.
1871년(고종 8) 정시에 병과 19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수찬(修撰)‧응교(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1876년(고종 13) 수찬 재임 시절 임금의 권면(勸勉)을 청하는 홍문관(弘文館)의 연명차자(聯名箚子)에 동참하였다. 1881년(고종 18) 부수찬 재임 시절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불태울 것과 시무책을 주청하는 척사소를 올린 홍시중(洪時中)과 황재현(黃載顯) 등의 상소문을 홍문관에서 문제 삼아 국문(鞠問)을 청할 때 동참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84년(고종 21) 응교 재임 시절 홍문관의 연명차자를 통해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모자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 등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1896년(건양 1) 예종과 예종의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위패가 있는 창릉(昌陵)에 불이 나 봉분이 훼손되는 일이 있었는데, 재관(齋官)이 보고를 누락하고 멋대로 잔디를 새로 입힌 사실이 드러나자 임금의 명으로 장례원경(掌禮院卿)의 직책으로 창릉을 시찰하였다.
[참고문헌]
縉紳八世譜
國朝文科榜目
高宗實錄
國朝文科榜目
高宗實錄
[집필자]
이은영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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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1 | 2011년도 국가DB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